고 이일훈 건축가의 '자비의 침묵' 수도원
"건축가 이일훈입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아마도 1995년 늦가을쯤일 것이다. 수인선 협궤열차가 운행을 중단하기 전에 수인선 열차를 타러 가는 모임에서 건축가 이일훈 선생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덩치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한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건축에 있어서는 확고하고 거침이 없었던, 그러나 선하고 겸손한 성정의 그였다.
그는 글솜씨도 뛰어났다. 그의 글은 선이 굵다. 동시에 매우 깊고 따뜻한 시선과 감정을 담고 있다. 적확한 어휘를 구사하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들. 이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직접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사문난적), ‘제가 살고 싶은 집은’(서해문집)은 가까이 두고 읽는 책들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열심히 건축을 사랑하며 어딘가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론'을 펼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한참 활동해야 할 나이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황망했다. 추도의 마음으로 뒤늦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비의 침묵’ 수도원을 찾았다.
‘시대와 소통하는 실천적 도구로서의 건축’이라는 담론을 내세운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공간이 건축가 이일훈의 ‘기찻길 옆 공부방’이었다. 건축의 공공성에 주목한 작업을 해온 선생이 인천 동구 만석동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지은 공간이다. 그에게 ‘사회성 짙은 건축가’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오랜 세월 연락이 없었던 터라 불쑥 전화하기도 민망해서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선생의 부고를 접했다.
지난 7월 2일 타계한 건축가 이일훈은 ‘채 나눔’ 설계 방법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년쯤 전, 홍대 앞의 카페에서 늘 작은 수첩(그는 늘 작은 수첩을 품에 넣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꺼내 그림을 그려가며 ‘채 나눔’의 개념을 열심히 설명하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채 나눔’은 선생이 1990년대 초부터 줄기차게 설파한 건축 이념으로 편리함을 좇는 우리에게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제안한다.
‘웬만하면 나누자. 그럴 경우 나누어진 내부 공간은 홑켜공간이 되므로 빛 바람 등의 자연 기후와의 관련이 편안하다. 일 년 내내 어두운 방을 만들디 않아도 되고 눈 비 맞는 외부공간을 껴안고 살 수 있다. 여러 채로 나누므로 땅 위에 자리 잡는 방법도 가뿐하고 맨 땅의 여기 저기를 조율하며 비움과 채움에 훨씬 융통성이 있다. 건축 공간은 안과 밖을 동시에 지닐 수 있고 주변 풍경을 택하는 데도 용이하다. 방과 방을 나누어 배치하고 연결의 방식을 눈.비 맞고 다니게 할 수 있고 실내 복도처럼 연결도 가능하다. 방과 방을 나눈 사이로 은밀한 정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그땐 그게 왜 필요한지 이해가 안 갔다. 나이들고 세상이치에 조금 눈 뜨고 일상을 지탱해 주는 자연의 소중함을 알게 되니 그 뜻에 공감이 간다. 감염병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이 시대에 가장 유효한 건축적 대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거리두기를 생활화해야 하는데 이미 그는 건물의 거리두기를 제안했던 셈이다.
경기도 화성시 외곽에 위치한 순교자의 모후 수도원, 일명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채 나눔’의 개념이 온전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공부하는 수련 수사들이 입소해 있는 신학원에 불쑥 찾아갈 수도 없어서 수원교구 소속인 남양 성모성지의 이상각 신부님께 연결을 부탁드렸다. 평일 오후 방문할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기록적인 폭염 속의 오후 2시.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신학원(‘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원래 이름)에 도착했다. 잔디가 깔린 마당 뒤로 녹음 속에 나지막한 회색 건물들이 보인다. 콘크리트와 스플릿 벽돌, 시멘트 블록 등 소박한 재료로 만들어진 건물들에는 세월의 흔적이 진초록의 넝쿨 잎과 함께 내려앉아 있었다.
마당에 배를 깔고 더위를 식히던 진돗개가 일어나 컹컹거린다. 멀리 제주에서 올라온 수도회의 양운기 수사와 경기대학원 제자로 선생과 인연을 맺은 아뜰리에 나무의 정성훈과 이수학 소장이 이어 도착했다. 취재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건축가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온 분들이다.
‘채’로 나눈 수도원의 삶
1994년 완공된 이곳에는 수련 중인 젊은 수사 18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신학교 2학년생인 김 모세 수사에게 일과를 묻자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아침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낮기도 하고, 공부하고, 저녁 기도하고 저녁 미사 드리고, 밤에 다시 기도하고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든다"고 답했다. 침묵의 시간에는 신학 공부를 한다. 식사 준비와 구역별 청소는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는다. 2인씩 한방을 사용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방을 옮기게 되어 있다. 살다 보면 짐이 늘어나게 마련인데 그걸 방지하고 가볍게 수도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앙의 열정을 품고 기도하고 밥 먹고 잠자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수사들의 삶이다.
‘작을수록 나누자’는 채 나눔은 홑켜공간을 근간으로 삼는다. 건축가는 우리 전통 건축에서 바깥 채, 안 채, 사랑 채 등으로 나누었듯 기능별로 단위 건물들을 나눴다. 땅의 높낮이와 연결하는 방식을 달리하며 다양한 동선을 만들고, 공간 구성을 통해 채 나눔의 철학적 권유를 풀어놓았다. ‘불편하게 살기’, ‘밖에서 살기’ ‘늘려 살기’이며 그 모두는 ‘불편함의 미학’이라 줄여 말할 수 있다.
채 나눔 설계 방법론의 범용적 사용을 고민하던 건축가는 미사를 드리는 경당을 수도원 경내에서 제일 먼 곳에 배치하면 어떨까를 제안했고 수행이 삶 그 자체인 수도회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건축가는 에세이집 ‘모형 속을 걷다’(2005, 솔 출판사)에서 이렇게 썼다.
‘경당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편하다. 비 오는 날은 비 맞고 눈 오는 날은 눈 맞아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특히 겨울 새벽에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뚫고 가려면 귀찮은 일이다. 일일이 옷을 챙겨 입어야 하고 미리미리 시간을 챙겨야 제시간에 맞출 수 있으니 귀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대충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양 수사는 “일반적으로 수도원은 기능을 한 군데로 묶어 인접한 건물, 혹은 하나의 건물에서 모든 일상이 이뤄진다. 이일훈 건축가는 공간을 ‘채’로 나눠 별개의 건물들로 구성하고 배치했다”면서 “불편함은 있지만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시시각각 풍요로운 사색 거리를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이야기가 있는 작은 경당
북쪽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경당은 생활관을 나와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돌로 만들어진 좁은 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야 도달한다. 정말 크기도 작고 소박하다. 제일 값싼 재료인 드라이비트로 외벽을 마감하고 가 기둥을 세운 것 말고 장식도 없다. 내부도 거친 콘크리트를 그대로 두고 장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정성훈 소장은 “싼 재료를 사용한 것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건축주의 사정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고 가장 흔하게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재료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쓰는가에 따라 그 건축의 맛이 더할 수 있다는 건축가의 평소 생각이 배어있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소박한 외관 때문에 가건물로 오인되는 바람에 몇해 전엔 지방도 확장 공사 때 성당의 절반이 잘려나갈 뻔 했다”고 양 수사는 전했다.
소박한 재료와 간명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경당은 일반적인 성당의 화려함이나 격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작은 공간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갖게 의도한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가 경당 곳곳에서 보인다. 경당 본 건물과 입구의 계단 사이에 철판이 놓여있는데 자세히 보면 살짝 분리돼 있다. 성스런 공간과 속세를 구분해 놓은 것이다. 3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 의자는 콘크리트 거푸집에서 뜯어낸 나무로 만들었다. 좌석 옆으로 ‘ㄱ’ 자 모양의 가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측랑의 효과를 냈다. 십자가는 따로 없다. 왼쪽 측면에 십자가 모양의 가벽을 만들어 설치하고 벽 뒤쪽 측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이 십자가 모양을 드러나게 한다.
제대는 시멘트로 만들었다. 제대 뒤의 벽에 설치된 구리로 된 삼각뿔 모양의 청동 조각 작품 같은 것은 성체, 제구 등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감실(龕室)이다. 육방체가 비스듬히 벽에 박힌 모양인데 나머지 반은 북쪽 외벽으로 돌출되어 있다. 건물 뒤로 돌아가면 북측 외벽의 튀어나온 감실 나머지 부분을 볼 수 있다. 감실의 표면에는 뱀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구리 뱀은 모세의 지팡이를 상징하며 두려움 없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 실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편함의 선물
건축가는 수사들이 편함에 습관이 되면 나태해지기 쉬운 것을 경계하며 경당을 멀리 두고, 매일 이곳을 오가며 자연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 이 장소를 가장 좋아한다는 윤 안드레아 수사는 “동지 즈음에 미사를 마치고 나올 때면 십자가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맞는다”면서 “계절마다 경당과 주변의 자연이 주는 감동이 더욱 경이롭다”라고 말했다. 안에서 편하게 생활하면 알 수 없는 자연의 조화다.
불편함의 미학을 들여놓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은 것이 ‘겸손의 복도’다. 생활관은 길게 가로로 배치한 2층 건물이다. 방을 여러 개 만들면 자연스럽게 복도가 생긴다. 건축가는 단순한 연결 통로가 아닌 의미와 효용을 지니는 복도를 만들 궁리를 했다. 경당을 일부러 멀리 두었듯이 복도를 일부러 좁게 만들었다. 생활관의 복도는 폭이 75㎝로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동시에 지나가기 어려운 넓이다. 그는 불편을 통해 수도사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저절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 서로 싸웠던 두 사람이 마주치면 먼저 비켜선 사람이 사과한 셈이 되니 서로 웃을 수 있다. 서로 먼저 가라고 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다. 매일매일 겸손하게 산다니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사는 수도자가 아니던가.’ (‘모형 속을 걷다.’ 중)
‘겸손의 복도’ 만큼이나 건축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이 난간 없는 계단이다. 생활관의 한 귀퉁이 2층에서 복도로 연결된 곳에 ‘하늘 성당’이라 이름 붙은 열린 열린 공간이 있다. 옥상을 이용해 만든 사각의 작은 공간으로 개인의 묵상과 특별한 날의 작은 미사를 위해 만들었다. 마당에서 옥상 공간으로 직접 올라갈 수 있도록 외벽에 계단을 만들었는데 난간이 없다.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건축가는 “여기서 떨어질 정도로 산만하다면 수도원을 나가야겠죠. 조심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래의 세 칸 돌계단만 남기고 뒤의 계단은 난간을 설치했다. 연로한 책임 수사신부가 있을 때 설치한 것이라고 양 수사는 설명해 주었다.
삶을 담는 그릇
그는 건축이 삶을 담는 그릇이며, 건축가는 삶의 방식을 제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수사들이 자연을 일상적으로 접하게 함으로써 날씨와 계절에 따라 반응하고 사색하는 삶을 유도했다. 채로 나눈 건물 사이사이에 휴식할 수 있는 녹지 공간을 만들었고 독서실 아래 필로티에는 테이블을 놓았다. 작은 경당 앞에는 길쭉한 판벽으로 만들어진 기도 공간 14처를 만들어 사색의 마당을 만들었다. 옥상 공간은 입구만 빼고 사방의 벽을 키보다 높게 쌓아 오로지 하늘만 보이도록 했다. 혼자서 하늘을 보며, 별을 보며 묵상 하기엔 여전히 제격이다.
다 큰 사람들 여럿이 공도체 생활을 하다 보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다. 울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는 그런 마음을 헤아렸다. 혼자 기도하고 싶을 때를 위해 건물 외부에 1인 기도실도 만들었다. 생활관 뒤쪽에 작은 풀을 만들고 물 위에 다이몬드 모양의 1인 기도실을 두었다. 물 위의 기도실. 물은 기독교에서 세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한다. 수 공간은 원래 여름엔 수련 수사들이 수영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용도로 디자인했지만 지금은 비어있다. 젊은 수사는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여름이면 바닥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곤 했어요. 옆에 도로가 생긴 뒤 지하수가 말라서 더 이상 물을 쓸 수 없게 됐어요.”
2007년 증축할 때 지어진 도서관 건물도 책을 보다가 밖으로 나가 자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테라스를 두었다.
수도원의 작은 건물들은 적절한 거리 또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수사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면 무조건 밖으로 나와서 가야 한다. 이른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기도하러 가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고 생각이 가다듬어져 겸손한 마음으로 경당에 들어가게 된다.
양 수사는 “건축은 겸손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일훈 선생은 늘 강조했다”면서 “건축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 작을 수록 나누자. 덩어리를 나누는 것은 건축에 숨통을 하나 둘 만들어 숨쉬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건축을 통한 사람의 소통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구멍 뚫린 , 그러니까 나누어진 건축물을 보면 반갑고, 한 덩어리로 서 있는 건축물을 보면 자꾸만 나누고 싶어진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그는 가고 없으나 건축은 남았다. 마음이 담기고 이야기가 있는 공간은 누추해도 초라하지 않고 따뜻하다. 삶과 맞닿아 있는 건축, 그가 추구하던 인문학적 건축은 이런 것이리라.
선생은 늘 말했었다. “원래 집 구경이 즐거운 취미 중에 으뜸이랍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며 곳곳에 배려와 의미를 담아 지은 공간을 걸으며 선생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는 ‘모형 속을 걷다’에 이렇게 썼다.
“집은 무너져도 ‘건축’은 죽지 않는다.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죽어도 ‘죽음’이 죽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