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예박물관이 지켜낸 것, 안동별궁의 풍경과 풍문여고의 추억
땅의 기억을 품고 새로 태어난 서울 공예박물관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시간이 멈춘 듯 하지만 도시의 모습은 계절이 바뀌듯이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거리 풍경이 바뀐 곳을 꼽자면 안국역 부근이 될 것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을 나와 윤보선길로 접어들면 속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왜지? 아하!! 속을 알 수 없게 만들었던 높은 담장이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널따란 마당이 딸려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반갑게 손짓하는 것 같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공예박물관이다. 높은 담에 가로막혔던 골목이 숨을 쉬면서 활기를 찾았다. 탁 트인 도시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서울 공예박물관 터는 원래 안국동 별궁(安國洞別宮· 줄여서 안동별궁)이 있던 자리다. 명당으로 유명했던 안동별궁은 궁 동쪽의 종친부와 더불어 조선 시대 왕실 사람들의 안가였다. 왕실 소유의 별궁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광산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에게 헐값에 팔렸던 것을 1937년 휘문의숙 설립자 민영휘의 아내 안유풍이 30 만환에 부지 4천여 평과 부속건물을 매입해 경성 휘문 소학교를 세웠다. 7년 뒤인 1943년 증손자 민덕기가 폐교된 여학교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증조모의 이름 ‘풍’ 자와 휘문의 ‘문’ 자를 따 풍문여고로 개편했다. 1945년 1학년 2 학급을 모집해 4월 10일 입학식을 거행하고 개교한 풍문여고는 2017년까지 그 자리에 있다가 강남구 자곡로로 이전했다.(학교를 옮기면서 풍문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시가 이 부지를 매입해 한국 최초의 공예박물관을 짓기로 한다. 현상설계에서 당선한 행림 종합건축사사무소·송하엽(중앙대 교수)·천장환(경희대 교수) 팀이 2016년 말부터 꼬박 1년을 들여 설계했고 2018년 5월 공사를 시작해 지난해 마무리됐다.
유리로 신축한 안내동을 사이에 두고 ‘ㄱ’ 자로 배치된 전시 1동과 전시 3동, 그 뒤로 야트막한 동산 위에 든든하게 서있는 400년 된 은행나무를 에워싼 듯 관리동과 전시 2동, 교육동이 들어서 있다. 6개의 건물동이 어깨를 같이 한 서울 공예박물관의 구성과 외관은 예전 풍문여고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
서울 공예박물관을 디자인한 천 교수는 “학교를 박물관으로 바꾸면서 들었던 생각은 오래된 건축을 남기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남기는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살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살려서 풍문여고 졸업생들이 이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너무 낯설지 않고, 새로 보는 사람들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 않은 느낌을 갖도록 디자인했다”라고 말했다.
유서 깊은 왕궁 터에 지어진 학교를 박물관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 건물이 처음 들어선 1940년대부터 1960년대, 80년대, 그리고 2003년까지 증축 과정에서 시기별로 공법이 달랐다. 일제 강점기 땅 위에 그대로 지어진 본관 건물의 경우 1층은 벽돌, 2층은 슬라브, 3층은 목조로 증축된 탓에 단열도 전혀 없고, 구조나 보강재가 취약해져 박물관 하중에 턱없이 부족했다.
천 교수는 “오래된 건축물은 구조를 보강하는 경우건 새로운 프로그램에 맞게 내부 공간을 바꾸는 경우건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면서 “기존의 기억과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도록 기존의 5개의 건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 각각 다른 기존 건물의 구축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며 새로움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본관은 헐고 박물관 용도에 맞게 새로 설계해 전시 1동을 지었다. 하지만 외관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하다.
“본관 전면부는 인사동에서 안국동으로 넘어올 때 가장 눈에 띄는 풍문여고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기존 입면이 가지고 있는 기하학적 질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반복된 창호의 크기와 배치 간격은 예전 학교 건물과 같은 비율을 적용하고 기존의 페인트 색깔과 비슷한 석재(룩소르 베이지)로 마감해 옛 모습을 간직하도록 했습니다.”
서울 공예박물관이 기증받은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을 상설 전시하고 직물 보존 연구실이 있는 전시 3동(직물관)은 1960년대 중반 건축가 김정수의 설계로 지어진 과학관을 리모델링했다. 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프리캐스트 공법으로 지어진 첫 건물이고, 반복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패널이 만드는 질서와 생동감이 좋아서 외관을 거의 그대로 살렸고 내부는 용도에 맞게 많이 바꿨다”고 말했다. 천 교수가 특별히 신경 쓴 것은 공간의 소통이었다. 전시 3동은 3층에서 안내동을 거쳐 전시 1동으로, 전시 1동 상설전시실 2층에서 전시 2동과 교육동 3층 어린이 박물관으로 연결 통로를 만들었다. 연결 통로에 서면 유리로 된 안내동을 넘어 윤보선길, 뒤로 돌면 시원한 운동장과 감고당길이 다 보인다.
전시 1동 측면과 후면은 기존의 벽돌과 함께 새로운 벽돌을 섞어서 쌓은 것이 특이하다. 천 교수는 “근대화에 의해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서울 공예박물관이 다시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옛것과 새것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전시 1동 뒤로 돌아가면 보이는 전시 2동(상설전시실, 공예 아카이브실)은 콘크리트 프레임 사이에 전벽돌을 새로운 방식으로 쌓아서 입면을 구성했다. 2·3층에 어린이 박물관을, 4층에 교육실을 둔 교육동은 가장 나중에 지어진 정보관을 리모델링했다.
천 교수는 “알루미늄 패널이 보기 거슬렸지만 둥근 형태의 존재감이 강해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면서 “기존 정보관의 형태에 3가지 색깔, 3가지 형태의 테라코타 루버로 외관을 입혀서 역동적이면서도 따뜻한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교육동은 옥상 공간이 압권이다. 옥상 전망대에서는 둥근 건물의 모양대로 둘러가며 서울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서울시에서 인왕산이 가장 멋있게 보이는 곳이다. 서측으로는 이건희 기증관(가칭)이 들어서게 되는 송현동 부지가 보인다. 이건희 컬렉션의 백미가 인왕제색도인데 실제 풍경과 겸재의 작품을 한곳에서 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천 교수는 “송현동 부지에 들어서는 이건 희기 증관과 서울 공예박물관의 보행공간이 연결되면 서울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책가방을 든 풍문여고 학생이 걸었던 동선을 따라 다시 걸어본다. 남쪽 인사동에서 오는 길은 담장이 없어져서 길과 마당이 만나니 한결 좋다. 돌담길과 별궁 터는 높이 차이가 1.5m의 단 차가 있어서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인사동 길로부터 시작하는 보행길의 흐름은 운동장을 지나 길게 늘어선 본관 건물(전시 1동)에서 멈춘다. 본관 앞의 커다란 광장은 길이자 박물관의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는 마당이 된다. 마당에는 안동별궁의 석등 기단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정독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의 돌담을 끼고돌아 들어오면 은밀한 후정의 공간을 만난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은행나무 동산은 완만하게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학교 교실에서 수없이 바라봤을 은행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니 왠지 마음이 놓인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전시 1동, 전시 2동, 교육동에 커다란 창을 낸 것도 어디서든 은행나무가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시를 관람하는 중간중간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 새겨진 역사와 흔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요. ”
천 교수는 “공예박물관은 어떤 의도된 하나의 새로운 구축 질서라기보다는 땅에 축적된 역사의 시간을 엮음으로써 도시의 시간 연결체가 되었으면 한다”면서 “언제나 열려있는 박물관 앞마당을 통해 출퇴근길로 오가거나 주말에 가족과 함께 잠시 거닐며 많은 사람들이 공예의 가치를 공유하는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 공예박물관은 공예작가와 함께 다채롭고 창의적인 공예작품을 제작해 박물관 내외부 공간에 설치해 놓고 있다. 안내동 로비에는 이헌정 작가의 도자 작품 ‘섬’이, 천장에는 김헌철 작가의 유리공예 작품 ‘시간의 흐름’이 설치돼 있다. 기획전시 및 상설전시가 열리는 전시 1동의 긴 로비에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최병훈 작가의 ‘태초의 잔상’, 한창균 작가의 대나무 작품 ‘리메인즈 앤 하이브’를 감상할 수 있다. 교육동은 로비에 박원민 작가의 ‘희미한 연작’, 옥상에 김익영의 도자 작품 ‘오각의 합주’를 놓았다. 마당에는 이강효의 도자작품 ‘휴식, 사유, 소통의 분청 의자 세트’를 놓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은행나무 주변에는 이재순 작가의 ‘화합’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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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초부터 서울신문에 건축오디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4주 간격으로 나가는 연재물을 시작할 때만해도 많은 계획과 포부가 있었지만 그대로 진행 된 것 같지만 않다. 건축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다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공간 작업에 매료되어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혼자 기획하고 섭외하고 취재하고 글을 쓰다보니 전문가들이 보기엔 많이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건축이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를 찾으며 시간을 쪼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서울공예박물관은 특히 좋았던 기억이 있다. 주변에 기사 공유를 했는데 땅의 기억을 살리려는 건축가의 노력과 성의에 감사한다는 반응이 많았다.
'... 어제 공예박물관 다녀왔죠.제가 1차에 떨어지고 속상한 상황에서 간 학교였는데.. 나이 많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친구랑 얘기하던 시간 몽롱한 잔디밭에서 수를 놓던 일, 과학관 강당에서 합창대회 연습하던 일등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죠. 공간에서 사라지고, '~터'라는 이름으로 남지않고 고스란히 그 시간으로 갈 수 있어 정말 좋다. 무엇보다 담도 없애 경계를 트고 확장한 공간의 느낌도 좋고. 곳곳에 공예박물관의 느낌을 주는 오브제가 눈길을 끌었구요. 아름다운 우리의 옛 공예품을 보며 자연스럽게 자랑스런 마음이 스미네요.'
지인이 보내온 글이다. 과거의 흔적을 싹 밀어 버리고 겉모습 화려한 고층 건물을 올리는 게 최선인 줄 아는 개발 우선주의 도시 서울에서 이런 공간을 만들어 준 건축가의 마음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