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황매산 '철쭉과 억새 사이'
가을 풍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풀이 갈대와 억새다. 모두 볏과에 속하기 때문에 생김새가 비슷해서 혼동하는데 갈대와 억새는 엄연히 다르다. 간단하게 구분하는 방법은 어디에서 그것들을 보았는지이다. 갈대는 슾지나 강가 등 물 주변에서 자란다. 억새는 산이나 뭍에서 자란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건축물은 경상남도 합천군의 군립공원인 황매산에 있는 '철쭉과 억새 사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이다. 건축가들로부터 좋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언젠가 다루겠다 생각하고 메모를 해 두었다. 멀리, 높은 산에 있는 곳이라 계절을 보고 있다가 여름이 지나갈 시기에 섭외를 위해 건축가 임영환 교수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취재노트를 펼쳤다. '황미산 철쭉과 갈대사이'라 적혀 있다. 이 메모를 적을 때만 해도 갈대와 억새를 구분하지 못했던게다. 황미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바로 황매산 '철쭉과 억새 사이'라고 고쳐 적고 취재를 위해 건축가 임영환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연락을 드린다고 사연을 보내니 "알겠다"고 즉답이 왔다. 늘 이렇게 쉽게 소통이 된다면 시리즈를 해 나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약속 날짜를 잡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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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축, 합천 황매산 ‘철쭉과 억새 사이’
하늘은 높고, 맑은 바람이 부는 가을이다. 찬란하지만 가장 짧은 계절 가을, 화려한 단풍구경도 좋지만 억새를 보러가는 것이 낭만을 찾는 이들에겐 제격이다.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황매산(해발 1113m)의 가을은 산 전체를 뒤 덮고 있는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룬다.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일렁이는 억새 언덕에 서면 어떠한 시련에도 과감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솟는 것 같다. 위대한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힘을 얻는다.
해발 850m 등산로의 길목에 위치한 관광휴게소 ‘철쭉과 억새 사이’는 가을이면 억새 군락이, 봄이면 철쭉 군락이 펼쳐지는 황매산 군립공원의 랜드 마크다. 햇빛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산등성이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늘과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장엄한 자연으로 들어가는 대문 역할을 하는 반원형의 나지막한 암갈색 건축물은 자연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한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철쭉과 억새 사이’를 디자인한 건축가 임영환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디림건축사사무소)는 “자연의 기록에 사람의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건축방식은 무엇일지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처음 황매산으로 올랐을 때가 늦은 가을이었어요. 서쪽으로 기울어진 햇빛을 뒤로 받은 억새밭이 작은 바람에도 은빛 비늘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억새를 보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소백산맥의 고봉인 황매산의 억새 군락은 정상부근 700~900m 지대, 이름 하여 황매평전에 펼쳐져 있다. 평평한 둔덕 위에 뭉툭한 봉우리들을 얹어 놓은 듯한 형상을 한 황매평전은 한 동안 젖소 방목지로 사용되면서 일대가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산 위 평야에 억새가 자라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철쭉과 억새가 산 전체를 뒤덮게 됐다. 자연이 더욱 위대한 이유는 이처럼 스스로 복원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황매산 가는 길은 멀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4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기차를 이용할 경우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까지 간 후 렌터카를 빌려 다시 2시간 가까이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접근이 어려운 덕분에 온전하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임 교수는 “목장이 운영되는 동안 황폐해진 산의 식생이 자연의 복원력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었는데 여기에 또 다른 인간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면서 “자연과 인간의 경계 역할을 하게 되는 건물인 만큼 모양과 재료가 자연에 거스르지 않도록 디자인 했다”고 설명했다.
황매평전과 작은 계곡 사이에 위치한 건축물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확하게 반원의 형태다. 암갈색으로 자연스럽게 녹이 생긴 내후성강판과 유리로 된 건축물은 고래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황매산을 배경으로,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계곡을 등지고 서 있다. 계곡이 흐르는 선을 따라 반원 형태를 하고 있는데다 높이가 3m로 낮아서 주변의 부드러운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다.
지붕은 반원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지만 아래 공간은 군데군데 비어있어 마치 문을 열어 놓은 것 같다. 임 교수는 “산으로 올라가는 동선이 건물로 인해 막히지 않고 어디로든 연결되고 봄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사이사이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것을 상상하며 디자인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철판으로 경계를 표시한 바닥 안쪽에는 회색 조약돌이 깔려있다. 걷기에는 다소 불편하지만 비교적 바위가 많은 황매산에서 산행할 때 느껴지는 감각과 유사한 효과를 내기 위해 자박자박 소리를 내는 조약돌을 사용했다.
건물은 콘크리트 뼈대에 철과 유리를 입힌 형태다. 억새 사이로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이유다. 콘크리트와 철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에 동화되는 재료들이다.
강판은 처음엔 단색의 검정이지만 자연스럽게 표면이 부식되면서 밝은 오렌지색으로 변했다가 사계절을 거치면서 붉은 색이 강해지다가 결국 암적색으로 정착한다. 노출되는 정도, 햇빛의 강도에 따라 부식의 정도가 다르고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과 아닌 곳의 색감이 달라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녹이 스는 특징이 있는 내후성 강판은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외장재이지만 산골짜기에 세워지는 공공건축에서 사용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임 교수는 후일담을 털어놓는다.
억새군락 40헥타, 철쭉 군락 30헥타의 어마어마한 자원을 품은 황매산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떠오르며 군립공원으로 지정됐지만 낡은 단층짜리 식당건물 말고는 변변한 휴게시설이 없었다. 어디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가를 물색한 끝에 합천군에서는 임 교수를 초청했다. 발주는 합천군청이 했지만 원래 이곳에서 식당과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던 지역주민 181명이 만든 영농조합에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건축비의 절반가량을 부담했다. 설계와 공사과정에서 주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던 만큼 과정은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특히 건물 모양과 재료에서 주민들은 강한 의구심을 표했다.
“기왕에 짓는 것이니 가능하면 높고 크게 지어졌으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세월의 힘으로 많은 것을 되돌려 놓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층으로 낮게 깔려 있는데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건물 모양에 대부분 주민들은 공감하지 않았어요. 왜 아까운 공간을 낭비하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지요. 건축 외장 재료도 녹이 스는 내후성 강판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합천군 농업기술센터 배길우 녹지조경계장 등 담당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수차례 주민 설명회를 열고 건축가의 의도를 알리고 주민들을 설득해 가면서 한발 한발 나아갔다. 독특한 모양과 소재를 이해 할 수 있도록 건물입구에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적은 글과 내후성 강판의 특성에 대한 안내문을 세우는 것으로 타협했다. 준공 직후의 검은색은 오렌지 빛을 띠다가 지금은 암적색으로 바뀌어 있다. 봄철의 철쭉과도 잘 어울리고, 지금 계절에는 은빛 억새와 멋지게 어울린다.
임 교수는 “건물이 완공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후성강판의 색감이 주변 자연과 계절과 조화롭게 변화하는 색감을 보는 것이 건축가로서는 너무 즐겁다”면서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건물 감리하러 올 때마다 주민들을 피해 다니곤 했을 정도로 반대가 극심했지만 자연에 부응하는 디자인을 양보할 수 없었고, 내후성 강판이야말로 황매산의 다채로운 날씨와 계절을 표현하는데 제격인 재료라고 생각해서 끝까지 고수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지간해서 공공건축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가가 아무리 좋은 계획안으로 시작을 해도 주변의 입김 등 여러 가지 변수들 때문에 초기의 설계의도는 변질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반면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던 ‘철쭉과 억새사이’는 공공과 민간이 함께 만들어낸 흔치 않은 프로젝트로 꼽힌다. 규모는 작지만 지역 주민도, 공무원도, 건축가도 행복한 성공한 공공건축이다. 지난 해 한국건축가협회상과 경상남도 최우수 건축상,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의 대통령상까지 휩쓸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풍광의 황매산은 사진 애호가들의 출사 장소로, ‘미스터선샤인’ 같은 역사물의 촬영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카페, 사무실, 화장실, 식당을 갖추고 지역 주민들이 재배한 지역 특산물도 살 수 있는 황매산의 랜드 마크 ‘철쭉과 억새사이’가 방문객을 맞는다.
“‘철쭉과 억새 사이’라는 건축물의 이름은 건물의 틈으로 철쭉과 억새가 보이는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철쭉을 보러 갈까, 억새 보러 가을 여행을 갈까 고민하는 우리의 마음을 은유하기도 합니다.”
철쭉이 피는 4월말부터 5월 초의 모습도 궁금하다. 임 교수는 개인적으로 눈이 내린 겨울의 황매산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 뿐인가. 철쭉은 지고, 억새는 아직 피지 않은 5,6월의 맑은 밤이면 황매평전의 별빛언덕에서 은하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철쭉과 억새의 사이 계절에 바라보는 밤하늘의 은하수는 얼마나 장관일까. 사계절 시간이 지나면서 ‘철쭉과 억새 사이’는 자연 풍광의 일부처럼 녹아들고 있다.
* 본문은 서울신문에 연재 중인 건축오디세이 22회 분으로 쓴 것입니다. 사진은 디림건축사사무소 제공으로 윤준환작가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