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호법면 교차 문화공간 '논 스페이스'
요즘 전국 곳곳에 근사한 공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것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주변 경관을 잘 살려 특색 있게 지은 곳들은 금세 입소문이 나서 접근성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도심의 경우 주차하기 어렵고, 대중교통이 가지 않고 등등 이유로 찾지 않기 일쑤요, 지방에 있으면 '거리가 멀고,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차가 밀리고' 등등 이것저것 따지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 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은 곳, 멋진 곳은 산 넘고 물 건너서라도 찾아간다. '경험'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뭐 특별하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그곳을 가기 위해 가는 것이다. (실용적 가치를 따지는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 요즘 전국에 있는 근사한 곳(카페이거나 카페를 갖춘 공간)을 투어 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가 되겠다.
경기도 이천 호법면에 새로 문을 연 '논 스페이스'. 영동 고속도로 호법 IC를 생각하면 일단 차가 많이 밀리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부터 떠오른다. 절대 거기까지, 특히 주말에는 영동고속도로를 타러 가진 않겠지만 건축과 그 공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나의 일이니 취재를 위해서는 이런 것 저런 것 모두 감수하고 가야 한다.
토요일에 건축가 정웅식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역시나 고속도로는 번잡했다. 그래도 이걸 지나고 나면 그곳에서 차분하게 건축가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카페는 성업 중이었다. ( 주인 입장에선 당연히 좋은 현상!)
설마 그냥 그곳만 가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으리라 상상도 못 했는데 시골에 뚝 떨어져 있는 카페에 참 사람이 많았다. 젊은 데이트 족부터 부모님을 모신 가족단위 나들이객,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 등..
건축주도 이 부분에 대해 놀라고 있는 중이다.
"요즘 젊은 이들은 확실히 달라요. 공간의 경계가 우리와는 다른 것 같아요." (건축주)
'논 스페이스'는 한 마디로 참 편한 공간이다.
논뷰! 논이 바라다 보이는 전원에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공간 자체가 사방으로 오픈되어 있으면서도 내부는 개별공간처럼 블록화 되어 있어 대면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어디서든 통창을 통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자연 속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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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흐름을 복원하고 지역을 재생하는 교차 문화공간 이천 ‘논 스페이스’
땅에는 오랜 역사가 있고, 오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산업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잃고 땅의 역사는 사라지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기억도 소멸되고 만다. 더 이상 젊은 인구의 유입이 없어진 농촌은 늙어간다. 건축이 이 모든 것을 되살린다면 어떤 방식이 될까? 경기도 이천 호법면에 지난봄 문을 연 ‘논 스페이스’는 과거 논농사의 기억을 담은 건축과 함께 실험적인 문화공간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지역 재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경기도 이천은 예로부터 쌀농사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호법면은 이천쌀의 주산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하고 가장 먼저 쌀을 수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의 문턱에 찾은 호법면 주박리. 관진 평야의 젖줄과도 같은 복하천의 짙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텃새와 한가로이 날아든다. 천변으로 피어나기 시작한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살랑이고, 하천을 따라 줄지어 선 논에는 벼가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관진산 등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봉긋이 자리 잡은 나지막한 산들과 그 사이사이의 논들이 주변 풍경을 이루는 평화로운 농촌. 그 한가운데에 ‘논 스페이스’가 자리하고 있다. 러스틱 라이프를 꿈꾸는 MZ세대들에게 핫 플레이로 입소문이 날 만 한 위치다.
‘논 스페이스’는 은퇴한 건축주가 오랫동안 꿈꿔 온 귀촌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건축가 정웅식(온 건축사사무소 대표)은 “논농사와 화훼농사를 하며 늙어가고 있는 지역 마을에 다양한 문화들이 교류하는 교차 공간을 가진 실험적인 문화시설을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생명과 가능성으로 지역을 재생시키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32년간 경기도 지역 공립고등학교를 돌며 기술교사 생활을 하다 호기롭게 명예퇴직을 한 건축주 유창길 씨는 평화로운 주박리 마을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정착지로 정하고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했던 낚시터를 구입했다. 방치된 지 오래여서 평소엔 쓰레기가 쌓여있고, 비만 오면 물이 넘치는 낚시터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울산시 변두리의 시골마을 논밭 사이에 설계사무실을 내고 자연을 관찰하며 의미 있는 작업을 해 온 정 소장을 만나면서 유 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지속 가능한 지역 재생에 관심이 많았던 정 소장은 “물이 맑고 풍부해서 논농사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화훼생산이 가장 많은 곳이지만 유명세와 달리 더 이상 젊은 인구의 유입이 없어서 지역 사회는 고령화되었다”면서 “건축을 통해 지역을 재생하겠다는 건축주의 생각에 공감했고 복하천이 유유히 흐르는 마을에 오면 마음이 편해서 프로젝트를 흥미롭게 진행했다”고 말했다.
주변의 논보다 좀 높게 쌓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노출 콘크리트로 된 사각기둥 더미들이 부락을 이루듯 모여있는 ‘논 스페이스’를 공중에서 보면 우물 ‘정’(井) 자를 여러 개 겹쳐 놓은 바둑판 모양이다. 논 한가운데에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라 이질적일 것 같지만 묘하게도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진다. 3년 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이곳의 예전 모습이 궁금해 1970~80년대 위성지도부터 구해 봤다는 정 소장은 “논길의 수로처럼 여러 개의 벽을 격자형으로 세워 중첩된 공간에 가로와 세로의 질서를 부여하며 논의 기억을 되살렸다”고 설명했다.
“오래전부터 천을 따라 자연 형성된 논이 있었고, 이후에 정비되면서 대상 부지는 논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로 활용되다 어느 순간부터 낚시터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관리가 되지 않아서 흉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논이 낚시터로 사용되면서 단절됐던 논의 흔적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땅의 기억을 짚어 단절된 흔적을 되살리면서 다양한 문화가 교차할 수 있는 건축 공간을 구상했다. 단절됐던 논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콘크리트 벽을 논길의 수로처럼 세웠다. 가로와 세로의 콘크리트 벽들이 교차하면서 다양한 공간 질서가 만들어졌다. ‘논 스페이스’는 가로와 세로의 질서가 잘 정비된 바둑판 논처럼 확연하다. 남쪽의 낮은 산에서 흘러오는 자연의 흐름이 논, 하천 그리고 반대편 작은 하천의 교차점을 통해 논과 산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다시 논과 산으로 반복되고 그 연장선에 논 스페이스의 벽이 이어지며 세로의 질서를 이룬다. 콘크리트 벽들이 교차하면서 직조된 공간에는 외부의 나무, 돌, 물, 하늘, 자연 등을 들여왔다.
가로와 세로의 벽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만들어지는 공간들은 논 스페이스의 특징이자 기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건축적 장치다. 정 소장이 ‘교차 공간’이라고 이름 지은 개별 공간들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다. 선형 공간이어서 동선이 길고, 각 공간이 영역화되어 있으며 외부 공간이 많이 만들어져 다양한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시점에 따라 다양한 소실점을 만들어내고 모든 방위에서 다양한 자연 풍경을 선사한다. 영역화된 공간은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즐길 수 있다. 긴 선형 공간은 다양한 활동이 서로 방해하지 않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릴 수 있도록 해 준다. 루프탑에 형성된 외부 교차 공간도 다양한 플랫폼을 생성하는 확장된 공간이 된다. 기본 형태는 1층 모양과 같지만 높낮이를 다르게 벽을 세우고 벽 사이에 유리를 끼워 전망을 고루 즐길 수 있는 루프탑은 때로 지역민들의 리버 마켓이나 공예품 전시와 판매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루프탑에 오르면 바닥에 깔아 놓은 자갈들을 밟는 소리가 자박자박 귀를 즐겁게 하고, 푸른 하늘 아래로 보이는 농촌 풍경에 눈이 시원하다. 하늘은 높고 가을바람이 산뜻하다.
정 소장은 “일반적으로 상업시설을 지을 경우 전망이 좋은 건축물을 짓고, 대형 공간을 만들어 좌석을 많이 배치하고 싶어 하지만 제가 이 땅에 와서 느낀 것은 건물을 낮게 지어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양하게 건축 안에 품어 내는 것이었다”면서 “작은 개별 공간들로 이뤄진 나지막한 덩어리를 짓자는 구상을 건축주가 흔쾌히 받아들여 줬다”고 말했다.
“다른 문화들이 서로 융합되고 소통하게 되면서 새로움을 계속해서 창출하게 됩니다. 가로와 세로의 질서로 만들어진 교차 공간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확장 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새로운 교차 문화들을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업공간을 뛰어넘어 민간이 만들어내는 지역 복합 문화공간의 플랫폼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감이 작동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정 소장의 말대로 입구에 들어서 비어있는 공간 아래에 서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탄화목재를 사용해서 만든 가구들 덕분에 후각이 작동한다.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재료의 물성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천정에 볏짚 노출 콘크리트를 시도했다.
“어릴 적에 모내기를 한 뒤 쌓아 놓은 볏단에서 놀던 추억이 있어요. 이 공간에서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벽은 시골 논바닥처럼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주었고, 천장에는 수작업으로 만든 중국산 멍석을 이용해 콘크리트를 타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볏짚이 변형되고 물성도 바뀌어 내부 공간에서 느끼는 감성이 달라질 것입니다.”
정 소장은 바둑판 모양의 ‘논 스페이스’ 브랜드 디자인부터 전시행사 기획까지 도맡아 돕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건축가의 역할이 공간을 구축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이 의도대로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그는 논 스페이스 첫 번째 전시로 이천 지역에서 작업하는 고판이 작가의 전시기획과 작가와의 대화를 직접 진행했다.
. ‘논 스페이스’라는 이름에 대해 그는 “사방으로 논이 펼쳐진다고 해서 ‘논 스페이스’이기도 하지만 보편화된 물리적 공간이 아니며(NON-SPACE), 차별화되고 실험적인 추상적 공간(NONSPACE)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건축주 유 씨는 카페와 공간 운영을 올해 스물아홉인 장남 호상 씨에게 맡겼다. 특별히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젊은이들이 찾아와 주는 게 신기하다는 그는 “건축의 힘이 정말 크다고 느꼈다”면서 “은퇴 후 이렇게 아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와 일할 수 있으니 더없이 즐겁다”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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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작업실 구경하는 것은 건축 답사 못지 않게 흥미롭다. 건축가의 개성과 취향, 철학을 담고 있으며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며 공간을 지어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난 번 울산에 취재가는 길에 건축가 정웅식의 건축설계 사무소를 잠시 방문했다. 그는 번잡한 울산 도심을 벗어나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작업한다. 논스페이스 공간은 이런 환경에서 작업하기에 더 자연스럽게 나왔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