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석유화학단지 내 KPX케미칼
산업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건축가들이 공장을 설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구조 개편으로 수명을 다하고 나서도 이들 공장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미술관이나 복합 문화공간으로 훌륭하게 활용되곤 한다. 압축 성장기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공장들은 어떨까? 비교적 저렴한 드라이비트 공법으로 빠르게 지어 기능에 충실하면 되는 거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건축가들이 끼어 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공장 같지 않은 공장들이 하나둘씩 들어 서면서 회색빛 공장 지대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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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조 8239억 달러(약 2166조 8천억 원)로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다. 우리나라의 무역액은 1조 2596억 달러(세계 8위), 수출(6445억 4천만 달러)만 놓고 보면 세계 7위다. 수치로 보나 성과로 보나 대한민국의 위상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어가는 외형적 성장에 비해 산업시설은 기름때 묻은 공장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스럽게도 건축가들의 손길이 미치면서 제품 생산을 위한 기능 못지않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편의와 디자인 감성을 담은 공장 건물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산업 현장의 풍경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건축가 김수영(숨비 건축사사무소)이 지난해 마무리한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 내에 신축된 KPX케미칼 울산공장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국내 최대의 공업도시인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 울산공항에서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공단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보던 디스토피아 같았다. 지상에선 탱크로리가 달린 대형 트럭들이 오가고 고개를 들면 회색빛 하늘 아래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장 탱크들과 연결 파이프들이 고층 빌딩처럼 서있고 거대한 굴뚝에선 수증기가 줄기차게 뿜어져 나온다. 한마디로 살풍경하다. 길 한편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대고 KPX 케미칼(울산광역시 남구 납도로 103)로 들어갔다. 미리 방문 요청을 해 놓은 터였지만 정문에서 다시 방문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 확인을 한 뒤에야 공장 단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화학공장 단지 내에 위치한 KPX 케미칼은 자동차, 침구류, 가전제품 등에 사용하는 우레탄과 반도체를 만들 때 사용되는 소재를 생산한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생산제품의 원료를 저장하는 탱크에서 시작해 파이프라인을 타고 이리 가고 저리 가면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제조공정이 이뤄질 것으로 짐작되는 공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12만 3000㎡에 이르는 부지 규모는 숫자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김수영 소장은 “현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 화학단지와 주변의 시설물들이 무척 낯설었지만, 기능을 고려해 노랑, 빨강, 파랑으로 구분되어 색칠한 파이프라인, 거대한 매스를 형성하는 철골구조와 반짝이는 금속패널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경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안전한 공장, 깨끗한 공장, 쾌적한 공장’, ‘PSM(공정안전관리) 정착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적힌 구호가 무색하지 않게 이 거대한 장치산업에서는 안전이 최고 우선이라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에 그어진 선은 하늘색과 초록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늘색 선이 그어진 곳 안에서는 안전보호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초록색 선이 그어진 구간(그린존) 안에서는 안전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다닐 수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주 출입구에 면해 단정하게 서있는 3층 높이의 붉은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 지어진 사무동 건물이다. 김 소장은 “기존에 있던 건물을 확장 이전하면서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은 거대 시설들과 함께 하나의 산업적 풍경을 이루면서 주 출입구에 면해 있는 만큼 기업의 상징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슈였다”며 “붉은 톤의 금속 재질이 갖는 선적인 요소들이 복잡한 산업시설의 배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건축가 김종규와 김준성의 사무실에서 10년 넘게 실무를 수련하고 2010년 숨비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2014년 제7회 젊은 건축가상, 2016년 김수근 건축상 프리뷰상, 2019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최우수상 수상이라는 성과가 말해주듯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며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규모와 상관없이 그가 구조와 치수, 빛과 같은 요소를 다루는 방식은 정교하고 깔끔하다.
“콘크리트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가벼운 것을 얹은 뒤 선으로 나눠야 주변의 풍경과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H빔이나 파이프라인의 선들이 가진 풍경을 공장의 기능적 요소들과 함께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주출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이어지는 사무동은 28 ×28m(연면적 2260㎡)의 정방형 건물로 조경 공간을 사이에 두고 기존 연구소와 일렬로 서 있다. 1층은 철근 콘크리트, 2~3층은 철골 구조를 적용했고 내부는 H빔을 사용했다. 기둥과 보를 중심으로 구성하면서 외피와 구조가 하나의 면을 이루는 방식으로 구축했다. 1층은 콘크리트 기둥을 4m 간격으로 놓되 콘크리트 외피가 기둥의 두께만큼 안으로 들어간 형태이고, 2~3층은 각 파이프 기둥을 2m 간격으로 놓은 뒤 벽돌색에 가까운 붉은색으로 도색한 알루미늄 외피를 밖으로 돌출시키는 방식을 취했다.
김 소장은 “콘크리트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철골 구조를 건축에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주변의 금속들과 관계를 구조적으로 연결시키는 시도였는데 철골을 사용해 보니 콘크리트와는 다른 공간의 성격이 도출됐다”고 말했다.
건물의 출입구는 1층의 모서리를 케이크 잘라낸 듯 삼각형으로 덜어내 만들었다. 출입구를 들어가면 외피의 색과 같은 붉은 벽돌색 바탕에 흰색으로 쓰인 KPX 케미칼 로고가 선명한 현관을 지난다. 현관의 천장 높이는 2.35m. 약간 답답하다고 느끼면서 자동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의외의 공간이 펼쳐짐에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인다. 3층 천정부터 바닥까지 뻥 뚫려 있는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하다. 흰색으로 마감된 캔틸레버 계단은 기둥이 없어서인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라운드 형태의 난간에도 빛이 부서진다.
“공장 내의 건물이기 때문에 도시의 화려한 오피스 빌딩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지을 필요는 없지만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빡빡한 현장의 무게를 다소나마 덜어낼 수 있도록 3층 높이의 보이드(void, 빈 공간)와 빛을 이용해 ‘부유하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
미술관의 아트리움을 연상하게 하는 보이드를 가운데 두고 각층에 사무공간이 둘러서 배치되어 있다. 빛은 12 × 5m의 천창에서 9㎜ 두께의 철판으로 된 루버(날개창)를 통해 실내로 들어와 흰색으로 칠해진 H빔 기둥과 보, 계단, 유리 난간에 반사되어 공간을 부유한다. 고흥석을 매끈하게 갈아 마감한 1층 바닥으로 떨어지는 빛이 반사되면서 중력을 잊게 만든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가 내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직접적인 교감을 주기를 바랐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붉은 톤의 외피는 건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색다른 시각적 즐거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김 소장은 “외피 색깔부터 내부의 보이드 공간, 디자인이 드러나는 캔틸레버 계단, 천창 등 파격적인 시도를 기업 오너가 적극적으로 수용해 준 결과”라면서 “ 처음엔 모두들 보이드 공간을 아까워했지만 이용하는 분들이 공장 사무실이 아니라 미술관에 오는 것 같아서 좋아한다 ”라고 덧붙였다. 사무실 내부도 말끔하게 디자인되어 있어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 설비들만 아니라면 화학공장이라기보다 최첨단 IT기업이나 갤러리에 와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3층의 공간은 미술작품들을 벽에 걸고 테이블을 놓아 갤러리로 꾸밀 예정이라고 한다.
김 소장은 앞서 양주의 음향기기 생산공장 소비코 사무동을 디자인했고, 오창에도 배터리의 부품(리드탭)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고 있다. KPX 케미컬에서는 석유화학 제품을 보관하는 탱크터미널에 위치한 KPX 글로벌 물류창고 건물을 추가 발주했다.
“산업의 역사가 긴 서구 국가에서는 공장이 건축의 영역으로 들어온 지 오래입니다. 공장은 기능면에서 구조적 부분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건축가들이 작업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공장이 건축이라는 분야로 아직 편입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오너들의 인식이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김 소장은 “지금까지 제조업 공장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적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를 보내는 공장이라는 환경이 좀 더 좋아지면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향상된다”면서 “근무자들의 복리후생을 높이고, 공장의 이미지 변화를 위해 건축물에 디자인을 더하려는 기업들이 늘어나면 젊은 층의 제조업 기피현상도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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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서울신문 기획 시리즈 <건축 오디세이>를 위해 작성한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보여줄수 없는 글과 사진을 추가해 소개합니다. 사진은 숨비건축사사무소 제공(사진 김용관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