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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Nov 26. 2022

프랑스 22 파리 시립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 전

비엔나의 야수, 오스카 코코슈카

센 강변에 있는 파리 시립미술관은 왠지 잘 안 가게 된다. 심지어 상설전은 무료로 볼 수 있음에도 이상하게 건너뛰게 되는 곳이다.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센터는 시대 구분이 확실하고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파리 시립미술관은 프랑스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많지만 뚜렷하게 정체성이 보이질 않는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파리 현대미술관'이라는 별칭의 명성에 걸맞게 야심 차게 마련한 '오스카 코코슈카 - 비엔나의 야수' 전시(특별 기획전이라 유료였음) 보러 파리 시립미술관으로 갔다.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포플러 잎이 뒹구는 길을 걸었다.


팔레 드 도쿄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립현대미술관의 건물 외관은 다시 봐도 별로 내 취향이 아니지만 날씨거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 카메라에 담았다.

이번 전시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에게 헌정된 파리 최초의 회고전이다. 화가이자 작가, 극작가, 시인이기도 한 작가의 70여 년에 걸친 작업을 시대 순으로 보여준다. 그는 20세기 초 유럽 예술의 중심이었던 비엔나에서  예술적, 지적 격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빈 미술공예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와 함께 비엔나 3인방으로 꼽힌다. 우리에겐 두 화가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만  표현주의 대표적 화가이다. 이 전시는 저항의 삶을 살았던 거장의  묵직한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준다.

그의 젊은 시절은 '도발적'이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젊은 예술가인 오스카를 끝까지 이해해 주고 지지해 준 사람은 건축가 아돌프 로스였다. (장식적인 건축을 비판하며 무장식의 건축을 주창했던 그 유명한 아돌프 로스가 절친이었다. ) 로스는 빈의 부유층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소개해 주기도 했는데 알마 말러(구스타프 말러의 부인)의 아버지 에밀 야곱 쉰들러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화가이자 예술가였던 에밀은 그의 딸을 오스카에게 소개했다. 젊은 오스카 코코슈카는 일곱 살 연상으로 4년 전 남편 구스타프를 잃어 미망인이 된 알마 말러를 열렬히 사랑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날 정도로 서로에게 빠졌다. 이때 그린 돌로미테 풍경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알마에게 실연을 당한다. 2년 6개월 동안 400여 통의 편지를 쓰며 재결합을 시도하지만 그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마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려고 실물 크기의 인형을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함께 산책도 하고 지내다가 불태워 버리는 일은 화가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훗날 오스카는 그걸 주제로 그림 '인형과 함께 한 자화상'도 그렸는데 이번 전시에 인형 사진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당대 예술가들과 염문을 뿌렸던 알마는 1964년 85세에 사망했다.

실연의 충격이 커서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자원입대하지만 1915년 8월 이마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1917년까지 요양해야 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1918년부터 1924년까지 드레스덴 아카데미 교수로 후학을 지도했다.  

그는 20세기 초에 빈 분리파에 가담했다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다. 인물화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적인 초상화를 그리기보다 모델의 내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담아내고자 했던 결과다.

“나는 인물의 삶을 표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으니 표현주의자입니다."라고 했던 그의 작품들을 보면 정말로 작품 속 인물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다. 어떤 관람자는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모델의 눈동자부터 표현법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들여다 보기도 했다. 어떤 이는 특히 마음을 끄는 작품을 드로잉북에 옮겨 그리기도 했다. 작품 감상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가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코코슈카의 작품은 너무나 직설적으로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퇴폐화가로 가장 먼저 낙인이 찍혀 작품 활동을 제한당했다. 1932년엔 그가 작업한 그림 중 5점이 드레스덴 박물관에서 압수당하고 히틀러 집권 후엔 그의 작품은 모든 공공 미술관에서 철거되어 공매되는 운명에 처했다. 작품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는 프라하를 거쳐 런던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예술적 저항운동을 본격화했다. 비슷한 처지의 아티스트들을 규합해 ‘자유 예술가 동맹'을 결성해 나치에 저항하는 한편 ‘퇴폐 예술가로서의 자화상' 등 작품을 남겼다.

2차 대전 기간 중인 1941년 런던에서 만난 올다 팔코프스카와 결혼해 영국 시민권을 받아 1947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파란만장한 시기를 넘긴 오스카 코코슈카는 1953년 스위스 국적을 얻어 스위스 레만호 부근 빌뇌브에 안착한 뒤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며 젊은 이들에게 예술작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시장에선 노년에 이른 그의 인터뷰 영상과 스위스에서 화가 지망생들을 지도하는 장면 등을  볼 수 있었는데 우직한 인상에 낮은 목소리가 프랑스 고전 영화배우 장 가뱅을 연상하게 했다.

그의 자화상에서도 시기별로 변화하는 내면이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인은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OK'였다.  강하고 거친 붓터치만큼이나 그는 말년에 이를수록 매우 편않해 보였다. 현대적인 표현적 회화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립한 그는 1980년 94세를 일기로 몽트뢰에서 사망했다. 죽기 몇 해 전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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