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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Sep 24. 2023

[건축 탐구]아파트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

놀면서 상상력이 쑥쑥 자라는 서울 강남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

서울 강남은 ‘지옥’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 대한민국 입시를 거론할 때마다, 천정부지의 아파트 가격을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좋은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욕망의 상징같은 곳. 상가 건물이 대로변에 도열하고 있고, 그 뒤로 아파트가 숲을 이룬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성장하다 아주 일찍부터 치열한 경쟁 사회의 일원이 되어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가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른바 셔틀인생. 비단 서울 강남에 사는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아이들이 겪는 상황이다. 

건축가 전이서(전아키텍츠 대표)가 강남구로부터 일원동 재개발단지의 키움센터 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이들이 학교과 집의 사이 시간, 돌봄의 사각지대에 찾아오는 곳인만큼 학원처럼 느끼지 않으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고,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당시 강남구의 ‘마을 건축가’(현재는 서울시 공공건축가제도로 통합됐다)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전 대표는 “아파트촌의 아이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다른 형태의 집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한다”면서 “아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의 집, 나의 공간’이 있는 마을 같은 공간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누리봄 키움센터 전경 (사진 이남선)

서울 시내의 각 구에서 운영하는 ‘우리동네키움센터’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에 부모의 부재로 돌봄이 필요한 초등학교 아이들(만 6~12세)이 방과 후에 머무는 곳이다. 규모에 따라 소규모의 일반형과 중규모의 융합형, 대규모의 거점형이 있으며 현재 서울시내에 거점형 7개소를 포함해 총 282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디에이치자이아파트 건설사로부터 기부채납을 받은 공간은 685.79㎡(207.8평)로 융합형 키움센터가 계획됐다. 건축가 이전에 아들 둘을 키운 전문직 엄마이기도 한 전 대표에게는 특별히 관심이 가는 프로젝트였다. 

서울 일원스포츠센터 1층에 위치한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를 아이들의 학교가 파하기 전, 조용한 시간에 방문했다. 직사각형의 공간은 꽤 커서 아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정에는 뭉게뭉게 흰 구름 무늬로 된 조명이 달려있고 말끔하고 모던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공간은 바닥재와 작은 집, 미끄럼틀 등 모두 자작나무 원목 합판으로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고 화사하다. 

“공간의 질이 좋아야 되는 이유는 아이들의 뇌가 공간 구석구석을 경험하면서 상상력이 확대되기 때문이에요. 아이의 인성, 창의성도 공간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 대표는 “다양한 입체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학습위주의 기능적 공간을 넘어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감성적 공간으로 다가가고자 했다”면서 “아이들 스스로에 의해 재구성되는 자율형 공간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미끄럼틀이 놓인  누리봄키움센터 홀(사진 이남선)

아이의 마음으로 찬찬히 공간을 탐험해보자. 왼쪽에 작은 집 모양의 상자들이 쌓여있다. 문을 열어보니 실내화와 스케치북, 색연필 등이 들어있는 사물함이다. 사물함 뒤 쪽으로는 그물망을 친 점프놀이공간(구름방)이 있다. 1층과 2층 사이 공간을 이용해 만들어놓은 것인데 활동적인 아이들이 특히 좋아할 것 같다. 구름방을 나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층층마을집’으로 간다. 집 하나를 골라 들어가 앉아보니 아늑하고 바닥에 푹신한 쿠션까지 깔려 있어 편안하다. 각각의 집들은 바닥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웃으로 들락날락하는 것도 가능하고 한 가운데에 상이 놓여 있는 넓은 집(도담방)으로 갈 수도 있다. 마루 아래쪽 수납공간에는 책들이 꼽혀 있다. 전 대표는 “아이들이 입체적인 공간에서 누웠다가, 앉았다가, 오르내리고, 뒹굴기도 하면서 숙제도 하고 책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미끄럼틀도 집처럼 생겼다. 아래쪽 으슥한 곳은 비밀 아지트로 삼으면 좋겠다. 미끄럼틀 뒤쪽으로 가면 세면대가 있고 테이블이 있는 다목적 공간이다. 나무가 있고 숲이 있는 것 같아 마치 캠핑장에 온 느낌이다.

캠핑장 개념을 살린 식당 겸 다목적실 (사진 이남선)

 캠프를 추상화한 ‘새움방’은 식사 외에도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는 등 다각도로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전 대표는 “아이들이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 숲속의 캠프를 가고 싶어 한다는 점에 착안해 식당을 캠핑공간처럼 꾸몄다”면서 “키움센터에서는 아이들에게 점심과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데 이왕이면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캠프를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초록색이 칠해진 벽을 따라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된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가니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의 기하학적 도상으로 구성한 것도 의미가 있다. “기하학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로부터 찾은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조형 언어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그냥 흡수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을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기하학의 원형을 몸으로 느끼도록 해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질서, 논리, 수리’의 개념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 

누리봄키움센터의 한쪽 벽면은 기하학의 기본형태로 입구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키움센터는 놀이공간과 공부공간, 즉 동적공간과 정적공간이 정확히 분리되어 있는 구조인데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는 구분이 없다. 전 대표는 “정적 공간과 동적 공간의 경계를 지우고 함께 놓아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꾸고, 즐겁게 작업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곳이 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이전에 관악구의 신성초등학교 도서관 리모델링을 하면서 아이들이 융합적 공간을 선호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주저없이 정적공간과 동적공간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했다. 신성초에서는 아이들과 워크숍을 함께 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아이들에게 원하는 공간을 물어봤더니 편하게 엎드리거나 누워 책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란다. 리모델링 후 도서관은 신성초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장소가 됐다.    

구름방(사진 이남선)

전 대표는 “키움센터에 오는 연령대의 아이들에게는 놀이 장소와 공부하는 장소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서 “공간을 만들어만 주면 아이들 스스로가 주어진 공간을 이용해서 자기들만의 장소로 만들어가는 간다”고 말했다. 

입체적 층층마루마을 공간(사진 이남선)

키움센터 홀에는 미끄럼틀을 길게 연장한 쿠션 트랙이 놓여 있다. 실내이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기도 하고, 엎드려서 긴 캔버스를 펴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의도는 그랬지만 막상 오픈하고 보니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뛰어 놀았다. 

“아이들에게 어른들 잣대로 만든 의도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다양한 높이, 다양한 스타일의 입체적 공간을 만들어 주면 아이들에게는 안락하면서도 상상을 자극하는 공간이 되어 규정된 기능을 넘어 아이들의 의도에 따라 반응하는 장소가 됩니다.”

‘아이들 스스로 주도하는 놀이와 쉼이 있는 공간’의 컨셉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의 크기와 높낮이가 각각 다르고 박공모양 지붕엔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도형들을 붙여놓았다. 문자화된 이름이 아닌 추상화된 도형의 사인은 아이들 저마다 의미있는 이름을 지어 붙이도록 한 것이다. 

누리봄다함께키움센터는 아직 코로나가 끝나기 전인 지난 해 3월 문을 열었다. 40명 정원에 조리담당 1명을 포함해 7명의 교사들이 근무한다. 일원동 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도 개방되어 있어 늘 대기자가 줄을 서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22년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문체부장관상을 받았고 최근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IF 디자인어워드 골드메달도 수상했다. 

‘디자이너가 공간을 사용할 대상을 명확히 이해했으며, 즐거우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재료, 형태, 규모, 빛과 같은 핵심매개변수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제안하고 있다.’ (IF디자인어워드 심사평)

전 대표는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공간의 힘은 크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칠 즈음 학교가 파하고 오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 아이들은 무슨 놀이를 하고, 무슨 책을 보며 어떤 꿈을 키울지 궁금했다.   

(* 이 글은 서울신문 건축오디세이 연재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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