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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Oct 20. 2023

건축탐구]‘바람의 노래’를 들려주는 제주 유동룡미술관

이타미준 건축의 오리지널리티를 담은 공간 

“온기와 생명을 밑바탕에 두고 그 지역의 전통과 문맥, 에센스를 어떻게 건축에 담아낼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다.”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 1937〜2011)에게 바람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대지를 어루만지고, 사람을 보듬는 바람. 1937년 재일교포로 태어나 40여 년 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경계에서 활동했던 그에게 바람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정신적 뿌리인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를 탐구하고 고미술품을 수집하며 고유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마침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이타미준의 예술정신을 오롯이 담은 유동룡미술관이 제주시 한림읍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에 들어섰다.  


현무암이 불규칙하게 깔린 암괴지대에 숲과 덤불 등 다양한 식생이 어우러진 곶자왈의 풍광에 익숙해질 때쯤 나지막한 미술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단단해 보인다. 강한 바람과 비를 이겨낸 제주의 전통 민가, 혹은 오름처럼. 새들이 목청껏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담을 끼고 들어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로비의 바닥과 벽은 온통 먹색이다. 미술관을 가득 채운 독특한 향기가 후각을 건드리는데 눈길은 자연스럽게 빛을 따라간다. 왼쪽에 있는 타원형의 매스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타원형을 살려 만들어진 통창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창 너머로 보이는 고요한 풍광은 무척 아름답다. 곶자왈의 자연 속에 차분하게 들어선 유동룡미술관을 설계한 이는 유이화 이타미준미술재단 대표다. 유동룡은 고국의 이화여대에 진학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아 맏딸에게 ‘이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아버지 소원대로 이화여대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재일교포로서 경계에 살았던 아버지를 닮아 어둠 속 밝음, 고독함 속의 고요함과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유 대표는 “이타미 준의 주요 테마인 ‘바람’을 의식하고, 제주의 풍토에 순응하며, 주변 곶자왈이 가진 수평적이고 고요한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을 한다는 것이 설계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건축이란 모름지기 지역과 역사 그리고 풍토에 뿌리를 두고, 관계에 대한 집중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타미준은 저서 ‘손의 흔적’에서 “제주도의 지형이 타원형에 가깝다는 의식 때문인지 스케치 또한 자연스럽게 타원형을 그리게 되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래서일까. 유 대표는 문화용도로 묶인 제주의 도유지를 매입한 뒤 가장 먼저 대지에 타원형을 그리는 것으로 설계를 시작했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타원형 공간은 1층과 2층에서 모두 이 미술관의 핵심이 된다. 1층의 타원형 매스는 이타미준의 라이브러리로 꾸미고 ‘먹의 공간’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버지가 창의력을 발휘하는 공간은 늘 먹색이었어요. 미술관의 분위기를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고요함 속에서 창작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공간의 컬러를 먹색으로 잡았습니다.”

같은 먹색이지만 각각 다른 재료를 씀으로써 빛을 받았을 때 소재가 내는 각각의 다른 소리, 존재감이 다른 느낌으로 드러난다. ‘먹의 공간’ 한가운데에는 이타미준의 첫 작품인 ‘어머니의 집’(1971) 모형이 설치되어 있고 한쪽 면은 라운드 형태의 통창을 설치하고 뒤는 책장으로 꾸몄다. 유 대표는 “아버지의 저서들, 아버지에게 영향을 준 건축가에 관한 책들, 재일동포 화가로 함께 모노하 운동을 했던 곽인식과의 2인 전 전시 도록 등이 고미술컬렉션과 함께 배치했다”며 “아버지가 물려준 조선말기의 책가도를 생각하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며 연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간에는 건축가 이타미준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 아버지 유동룡에 대한 그리움도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타미준은 본질을 중시하고 자연을 존중하는 건축, 아날로그 건축, 온기가 살아있는 건축을 추구했던 건축가다. 문의 손잡이, 용머리 모양의 손잡이 등 미술관을 이루는 하나하나에 그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 사진과 도면을 보고 이타미준이 디자인했던 의자도 재현했다. 심지어 공간의 냄새와 차의 맛까지도 이타미준의 기억을 재현해 내고자 했다. 

유 대표는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먹향과 함께 고서적과 오래된 그림에서 나는 냄새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면서 “‘먹의 공간’에 들어온 방문객들도 그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조향사와 함께 특별히 시그니처 향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1층에는 라이브러리 외에 교육실과 티라운지 ‘바람의 노래’, 뮤지엄 스토어가 있다. 교육실에서는 아날로그를 추구했던 이타미준의 철학을 바탕으로 손의 감각을 회복하고 자연 소재의 본질을 경험하게 하는 어린이 정규 교육 프로그램(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 공식프로그램 ESD 인증)이 열린다.

자연광이 흐르는 매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 2층 전시관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개관전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나다’가 열리고 있다. 1전시관은 아래층 먹의 공간에서 이어지는 제주의 타원형 공간으로 이타미 준이 남긴 제주의 대표작들을 전시한다. 수· 풍·석 미술관, 두손미술관, 방주교회 등 제주의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건축을 만날 수 있다, 2전시관은 40년에 걸친 그의 건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구성한 전시공간이다. 물질의 본질과  관계에 집중한 1970년대부터 인간의 온기와 야성미를 가진 건축을 추구했던 1980년대, 건축이 매개하는 관계에 집중했던 1990년대, 그리고 말년의 작품까지 대표작들을 글과 드로잉, 모형, 사진으로 구성해 보여준다. 그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무엇이 중요하게 작용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3전시관은 다큐멘터리와 인터뷰영상을 관람할 수 있는 영상실이다. 이타미준이 디자인한 의자에 앉아 그의 육성과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2층 1전시실 photo by kim yongkwan

관람 동선은 로비에서 2층의 전시실을 둘러보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티하우스 ‘바람의 노래’에서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하며 좀 더 긴 시간을 차분하게 보낼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특별히 블렌딩 한 ‘바람의 노래’라는 차를 맛볼 수 있는 티라운지는 진정한 힐링의 공간이다. 평소 사유의 방식으로써 차를 즐겼던 이타미준은 귀한 손님들에게 정성스럽게 녹차와 호지차를 내어주곤 했다. 그의 삶을 닮고자 바람의 노래에서 다양한 티서비스를 제공한다. 티세리머니와 더불어 곶자왈과 빌레(제주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바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 대표는 “작은 공간이지만 이타미준의 창작의 공간에 초대받아 환대를 받는 느낌을 받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간을 꾸몄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와 한 바퀴 둘러본다. 건물 외벽은 나무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옹이문양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 콘크리트 자체가 가진 물성을 나무의 패턴으로 상쇄시킨다. 미술관을 둘러싼 낮은 스테인리스 담장은 자연 속에서 가장 현대적인 소재와 대비되면서도 조응한다. 정원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럽다. 바닥은 울퉁불퉁하다. 공사하면서 나무 덤불과 흙을 조금 거둬냈더니 제주지형 특유의 빌레가 나타났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그대로 살렸다고 했다. 

건축가 유이화 @함혜리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를 어떻게 건축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지.. 행여 누가 될까 걱정도 됐고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면 물어가면서 하면 되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기억의 하나하나 작은 조각이라도 끄집어내 모든 것을 재현해 내고자 했습니다.” 

유 대표는 “건축가 유이화가 설계는 했지만 철저하게 건축가 이타미준을 의식하고, 이타미준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기 위해 디자인한 공간”이라며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요즘 시대에 필요한 본질, ‘오리지널리티’의 힘을 회복하도록 돕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술관을 가득 채우는 먹향 속에서 눈과 귀로 전시를 즐기고 바람의 노래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느끼며 먹의 공간에서 독서와 사유를 경험한다. 이렇게 유동룡 건축의 본질을 탐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은 ‘나’의 내면을 향하게 된다. 부드러운 바람이 노래를 하듯 스친다.  

* 서울신문 건축오디세이 33회를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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