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노마드 함혜리 Nov 22. 2023

건축탐구] 33년 이어진 건축물과의 인연  

"건물에도 영혼이 있어서 나를 찾아온 것 같다." (백문기 건축가) 

건물과의 이어지는 인연, 비포 & 애프터

강남구 개포동 국악고등학교 사거리에서 한 블록 안 쪽으로 들어온 골목, 비슷비슷한 외관의 4~5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른바 ‘근생(근린생활시설)’으로 분류되어 지어진 건물들이다. 건물들의 나이는 엇비슷해 보인다. 이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레트로 스타일의 건물이 있다. 흰색 격자무늬 프레임에 붉은 벽돌과 유리창으로 외관을 마무리한 것이 범상치 않다. 일반적인 ‘강남 근생건물 리모델링’ 케이스겠거니 할 테지만 33년 전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리모델링을 맡아했다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한 세대라는 시간을 넘은 건축가와 건물과의 ‘인연’이 만들어낸 ‘헤즈 빌딩’의 이야기다. 


디자인회사 헤즈(HEAZ)는 강남구 논현로 12길에 있는 ‘락 빌딩’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본사의 둥지를 틀었다. 건물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지어졌고, 2023년 리모델링을 마쳤다. 설계와 리모델링을 한 건축가는 백문기(75) 더스튜디오 공동대표다. 42살 때의 그가 설계하고 75세의 그가 리모델링을 했으니 한 세대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잊힐 법도 한 시간이고, 크기나 규모에 관계없이 건축물을 짓고 나면 건축가의 존재는 사라져 버리는 대한민국의 풍토에서 정말 보기 드문 일인지라 백 대표는 얼마 전 동료 건축가들을 초대해 ‘Before(1989) and After(2023)’라는 제목으로 작은 차담회 겸 오픈하우스 행사를 갖기도 했다.

“42살 때에 설계한 건축물을 내가 33년 뒤에 리모델링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백 대표는 “리모델링 의뢰를 받고는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인연’이었다”고 말했다. 

before / 사진  임정의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잘 나가는 대형 설계사무실에 다니던 백 대표는 40대 초반인 1987년 독립해 ‘인토(人土)’라는 이름의 설계사무소를 열고 강남 일대에 ‘ATTIC 시리즈’를 짓고 있었다. 주거와 상업시설을 겸하는 근린생활시설 건물이 강남의 골목마다 생겨나던 시절. 당시 유행하던 노출콘크리트와 벽돌을 이용해 기하학적인 스퀘어 외관을 하고, 옥상 공간의 주거 활용도를 높인 그의 디자인은 꽤 반응이 좋았다.  

“어느 날 건축주 한 분이 찾아오셔서 서초동에 있는 ‘ATTIC1’을 봤다면서 의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건축가에게 맡길 테니 다 짓고 나서 열쇠만 넘겨달라고 하고 갔어요. 설계비는 적었지만 한창 의욕적으로 일할 때이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 더욱 책임감이 생겨서 열심히 공간을 쪼개어 가며 연구를 해서 완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 

당시 주소로 강남구 포이동에 있는 부지는 이면도로에 저밀도 주거단지로 조성되어 조용한 편이었다. 대지면적은 80평 정도이고 건축면적은 30평 정도. 백 대표는 지하층의 일부에 선큰(sunken·지하공간을 만들어 자연광을 유도하는 구조)을 두고 옥상에는 1.5 m×1.5m 크기의 안마당을 가진 15평 규모의 작은 주택이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을 설계했다. 

“평당 공사비는 80만 원 선으로 당시 시세로도 부족한 편이어서 공정과 공사비를 줄이려고 머리를 짜내고, 설계하면서도 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질서가 있는 가구식 구조에 벽을 끼워 넣고, 구조 간의 사이를 벽으로 막고 600㎜ 공간을 두어 H빔으로 창틀을 수직으로 세운 디자인을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내 집을 짓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꼭 맞는 치수로 설계해서 용적률을 최대한 살리고, 재료도 최대한 아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철골 창호, 콘크리트와 테라코타, 선큰가든, 마당이 있는 옥탑방으로 요약되는 원 건물은 조형성과 경제성을 감안한 결과였다. 현관 홀이 좀 좁은 듯해서 시각적으로 트이게 하기 위해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일직선의 수직계단을 만들었다. 반층마다 생기는 공간에는 화장실을 두고, 마지막 층은 외부마당을 통해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주거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옥상의 주택은 ‘ㄷ’ 자형 평면으로 설계하니 작은 쌈지마당이 생겼다. 집은 작아도 마당에서 하늘이 그대로 보이니 공간감이 있다. 마당의 배수구를 막으면 수(水) 공간이 되어 여름에는 물을 담아 수증기를 만들고, 겨울에는 마당에서 눈 내리는 것도 볼 수 있게 했다.

세월이 흘렀다. 한 세대가 지나니 건물은 노후했고 H빔은 녹이 슬어 매번 페인트칠을 새로 하기도 버거워질 무렵이었다. 2003년 회사를 설립하고 이곳저곳으로 회사를 이전하면서 사옥을 마련하려 강남 구석구석을 뒤지던 HEAZ의 배명섭 대표는 이 건물의 사진을 보고 간단치 않은 아우라에 눈길이 갔다. 배 대표는 “이 건물을 보자마자 위치나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이 건물과 함께하는 회사의 긍정적인 모습이 보였다”면서 “하나의 건물에도 인생과 같은 시간의 척도가 적용되는 거라면 이 건물은 한 세대를 살아 충분히 나이가 들었음에도 앞으로 뭔가 새롭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처럼 살아있는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관리해 온 건물주를 설득해 건물매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이 건물을 디자인한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지금도 현업에 있다면 조언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건축가를 찾았다. 원 건축주의 소개로 어렵지 않게 건축가와 새 건축주가 연결이 됐다.

백 대표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건물을 설계하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인연이 이어져서 언젠가 나를 찾아온다, 그러니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후배 건축가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건물 지을 때도 건물주가 모든 것을 맡겼던 것처럼 리모델링도 디자인감각이 있는 젊은 새 건물주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after / 사진  유재력

백 대표가 리모델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창(窓)’이었다. 기존에는 간 사이를 좌우의 세로형 창과 벽으로 막았었지만 리모델링을 하면서는 개방감 있게 유리창으로 개구부를 냈고 벽돌면으로 마감했다. 격자틀마다 위에는 큰 통창을 내고 아래에 작은 창 2개를 내었다. 백 대표는 “위의 창은 바라보는 것이고, 아래의 창은 환기를 하면서 숨을 쉬는 창”이라고 설명했다. 윗 창과 아래 창 사이에는 검은색 오석 통돌을 가로로 놓아 안정감을 취했고 나머지 외벽과 내부를 붉은색 벽돌로 마무리해서 레트로 하고 안정감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기존 노출 콘크리트의 각진 프레임은 새 건물주의 희망에 따라 백색으로 처리했다. 

옥상의 주택에 있던 작은 마당을 없애고 마루를 깔고 유리 천장을 설치해 아늑한 느낌이 나는 회사 대표의 집무실로 만들었다. 대신 옥상에 시멘트블록으로 정사각형의 내부 담을 쌓아 산책로와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옥상에서는 구룡산이 아름답게 조망된다. 현관 오른쪽으로 25평 정도의 점포가 있던 공간은 직원 휴게실 겸 전시실로 만들어 직원들이 손님을 만나 상담하거나 휴식할 때 이용하도록 했다. 붉은 벽돌을 실외에서 실내까지 연속해 사용함으로써 지하에서부터 지상, 그리고 사무실 내부까지의 여정이 만들어졌다. 백 대표의 오랜 관심사인 ‘골목길을 건물내부에 들여놓기’가 현재의 건축에서 더욱 완성된 듯하다. 

엄격한 구조미의 격자틀은 이 건축이 지속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백색의 격자형 프레임, 격자 틀 안의 붉은 벽돌과 유리창들이 만들어내는 파사드가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골목 안에서 노년을 맞았던 ‘락 빌딩’은 오래전 이 건물을 태어나게 했던 노련한 건축가의 손에 의해 젊고 감각적인 디자인 회사의 미래 비전을 담은 ‘헤즈 빌딩’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에는 영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영혼은 시간이 갈수록 드러나기도 하고 어느 때인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디자인의 우월을 떠나서 33년 전 단순히 일로서 처리한 것이 아니라 혼을 불어넣어 작업했던 것이 영혼이 되어 나를 찾은 게 아닌가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백문기 건축가는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1978), 원주 만종감리교회(1995), 경기 고양의 원당성당(2005), 대전 이응노미술관(2007) 등을 설계했으며 정림건축 수석부사장(1998~2005)과 디자인담당 사장(2007~2008), 공간 스페이스그룹 사장(2008~2011)을 지냈다. 승효상, 조성용, 이일훈 등과 함께 건축가그룹 4·3 동인이기도 한 그는 종로구의 공공건축가로 활동하며 건축을 통한 세대 간의 원활한 소통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 서울신문 건축오디세이 (2023. 11월 13일 자)를 위해 쓴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건축탐구]‘바람의 노래’를 들려주는 제주 유동룡미술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