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터, 종친부 옆 현대미술의 요람
개관 10년, 도심 속 예술공원 국립현대미술관 (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약칭: MMCA) 서울관
서울 삼청로를 걷는다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혈관을 타고 서울을 탐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삼청동, 사간동, 소격동, 가회동까지 이어지는 골목 곳곳에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삼청로 30, 이하 서울관)은 이 혈관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에 해당한다. 옛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터에 들어선 서울관이 2013년 11월 문을 열었으니 어느덧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아직도 낯선 것과 달리 서울관은 마치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울 도심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사무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기무사 건물, 전시동, 교육동 건물들은 나지막하니 조화롭다. 궁궐터에서 170년 시간을 보낸 비슬나무 세 그루가 여전히 푸르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주니 지나가는 사람도, 보는 이의 마음도 편안하다. 미술관 건물들이 에워싼 마당을 지나 2021년 국가보물로 승격된 종친부(宗親府) 건물에서 북촌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시공의 경계가 없는 공원처럼 방문객들에게 휴식의 시간을 선사한다. 종친부 건물을 등지고 바라보니 왼쪽으로는 붉은 벽돌로 된 옛 기무사 건물이, 오른쪽에는 밝은 베이시색의 테라코타를 두른 미술관 건물이 정겹게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로 경복궁 담장이 보이고 저 멀리 인왕산의 산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설립 초엔 디자인이 너무 밋밋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건축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건축가 민현준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건축사사무소 엠피아트 대표)는 “서울관은 처음부터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DDP처럼 오브제적인 미술관이 아닌 ‘무형의 미술관(Shapeless Museum)’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무형의 미술관이란 건축물의 형상보다는 건축물 사이 공간인 ‘마당’이 미술관의 공간시스템을 정의하며, 미술관이 작동하는 중심이면서 이웃과 공유하는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계획의 요지다.
민 교수는 “건축물 자체의 아이디어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터에 현대미술관이라는 거대한 기능을 안착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면서 “미술관도, 문화재도, 이웃도 아닌 중립적인 마당을 중심에 둔 배치는 사회적 소통의 프로세스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서울관의 구조와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미술관이 위치한 대지의 지리적·역사적 조건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소격동에 있던 기무사가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했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2009년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 그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조성’ 계획을 밝혔다. 등록문화재인 옛 기무사 건물은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의 외래진찰소로 개원해 1932~3년에 증축했고 광복 후에는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과 육군통합병원으로 쓰이다 1971년부터 기무사가 사용했다. 기무사터 안에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강당 등 건물 11개 동과 테니스장, 연병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격동의 역사를 버텨낸 이 땅에 미술관을 짓기 위한 공모전이 2009년 12월부터 진행됐다. ‘경복궁 옆, 기무사 터’라는 땅의 특이성에 기반한 아이디어 공모에는 국내외에서 113개 팀이 참가했다. 여기에서 선발된 5팀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미술관 면적과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2차 공모전이 진행됐다. 이 무렵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한다. 1981년 신군부에 의해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던 종친부 건물을 제 위치로 복원하기로 하면서 공모전의 핵심은 ‘종친부 터 미술관’으로 바뀐다.
“과거지향적인 종친부와 마주하게 되는 현대미술관의 자세를 재정립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종친부의 모습이 기록된 화첩 ‘숙천제아도’의 종친부 그림을 미술관 대지에 콜라주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 위에 옛 기무사 건물과 계획 중이던 미술관 건물을 겹쳐봤습니다.”
종친부와 옛 기무사의 팽팽한 긴장 관계 사이에 새 미술관이 자리를 차지하자 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지면서 기존의 도시와 결합한다. 바다에 섬들이 떠있듯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물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건물들을 배치한 ‘군도(群島) 형 미술관’이 그려졌다. 민 교수는 서울관의 전체적인 배치가 결정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민 교수가 대표로 있는 엠피아트 컨소시엄은 1차 공모에서 내걸었던 ‘무형의 미술관’ 개념을 발전시킨 ‘장소 특정적 미술관’을 제안해 최종 당선했다.
서울관 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게 법규가 얽힌 곳이었다. 경복궁, 종친부와 옛 기무사가 각각 독립적인 문화재이다 보니 건폐율, 용적률 및 높이 제한 등의 일반적 건축 법규 외에 지구단위계획과 도시계획법, 문화재 법이 적용된다. 문화재 분야에선 종친부 터에 현대미술관을 짓는다는 것 자체에 반감을 드러냈고 이웃한 동네마다 다른 민원이 제기됐다.
“당시 우리 미술계에게는 동시대 미술 전시에 적절한 전시환경을 가지고 있는 서울 도심의 미술관이 꼭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의미 있는 결과물을 이뤄내기 위해선 우리의 제안을 주장하기보다는 수많은 의견과 요구를 존중하면서 퍼즐처럼 엉켜있는 상호 모순적인 제한과 문제들을 3차원 공간 안에서 풀어나갔습니다.”
동시대 미술을 품을 수 있는 서울관의 전시공간은 1관을 제외하고 모두 지하에 배치되어 있다. 지상은 문화재와의 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있지만 지하는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하를 중심으로 미술관에 필수적인 시설들을 설계했다. 서울관은 4차례의 문화재 심의와 17개 도시 및 건축심의 등 총 34번의 심의를 통과한 끝에 완성됐다.
미술관 마당으로 향하는 낮은 띠창이 있는 장방형 로비 공간의 수평통로는 예술로 진입하는 시퀀스 역할을 한다. 긴 통로를 지나면 오른쪽에 1 전시실이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높이 9m의 전시공간인 ‘서울박스’와 지하의 2~7 전시실로 연결된다. 하늘로 열려있는 ‘전시 마당’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서울박스와 지하공간을 채워준다. 전시실은 전통적인 벽 중심의 화이트큐브형(1 전시실), 설치미술을 위한 공간 중심의 매직박스형(2~7 전시실), 다원예술을 위한 블랙박스형(다원공간)의 세 가지 타입이 있다. 1 전시실은 로비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관의 대표적인 전시실로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1 전시실과 지하의 2 전시실은 수직으로 연결된다. 서울박스와 전시박스 사이의 4,5,6 전시실은 현대미술을 위한 전시실로 기둥이 없고 층고가 상대적으로 높다. 7 전시실은 뉴 미디어, 비디오 아트 등 첨단예술을 위한 공간이다.
전시실 밖의 ‘역공간’도 독특한 기능을 갖는다. 2~5 전시실이 에워싸면서 만들어진 서울박스, 서울박스와 전시마당을 연결해 주는 색동홀이 대표적인 역공간이다. 색동홀은 중요한 동선 공간으로 관람객들이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다가 설치된 작품을 만나는 의외의 예술적 경험이 가능하다. 미술관 마당도 역공간이다. 마당에서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등 대형 야외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민 교수는 “고전적 미술관에서는 연대기 순으로 작품을 배열함으로써 강요적이고 수동적인 선형 관람 동선이 주를 이루지만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고 주제별 전시를 하는 경우는 이런 동선이 적절치 않다”며 “서울관은 전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능동적으로 전시를 선택해 자율적으로 이동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네트워크 동선’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주인공은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들과 예술가들입니다. 한번 보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 곳이 아니라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관에 익숙해지고 동네처럼 친근해지는 미술관, 공원 같은 미술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하는 공원이란 물리적인 공원이 아니라 '심리적인 공원'이라고 했다.
“설계와 완공까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분이 의도했던 대로 운영되고 있어서 방문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는 민 교수는 서울관의 설계과정을 담은 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건축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는 10년 정도 사용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개관 당시에는 건축 외적인 정치적·사회적 요인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건축 자체로만 볼 수 있는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까지의 글은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건축오디세이 기획을 위해 쓴 글입니다. 사진은 민현준 건축가 제공입니다. (필자 주)
엊그제 같은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개관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취재하러 수없이 갔던 곳인데 갈 때마다 공간 감각이 마비된 듯 길을 잃곤 했었다. 건축가와 함께 공간을 다시 꼼꼼히 짚어보면서 살펴보고 나니 이제 좀 감이 잡힌다. 역시 공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민현준 교수는 지치지도 않고 나를 이 섬, 저 섬 여기저기로 이끌었다.
"안 힘드세요? 건축가는 체력이 좋아야겠어요. "
헉헉거리며 묻자 민 교수는 말했다.
"내가 설계한 건물은 아무리 다녀도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리고 드디어 다다른 곳은 교육동 2층 역공간(anti space, 위의 글 중에 설명이 있음)이었다. 여길 왜 왔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민 교수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보세요. 비슬나무가 바로 보이죠?"
나는 놀라는 척하며 "어머나 그렇네요.!"라고 말한 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다가 한 마디 했다.
"유리 창이 몬드리안 그림 같네요."
민 교수는 "그렇죠? "라며 설명을 이어간다.
"비슬나무를 볼 수 있도록 창을 크게 설계에 넣었어요. 그런데 저 유리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판유리 중 가장 큰 거였어요. 저 창에 맞는 것을 하려면 중국에 주문을 해야 한대요. 개관날짜를 정해 놓고 있는 상황이라 그러기에 시간이 없었고, 예산도 없었죠. 그래서 중간에 프레임을 만들어 넣어서 작은 유리를 끼워 넣었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던가. 임기응변이 만들어낸 격차 창. 이제 그곳에 갈 때마다 그 사연이 생각날 것 같다.
개관전을 취재하러 가서 서울박스에 서도호의 작품이 전시된 것을 보고 감동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감동받고, 기억한다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그 이미지가 뇌리에 남는 것 외에 당시의 감정까지도 아직 느낄 수 있다는 것..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동안 했던 수많은 전시들이 모두 이렇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이건희 기증품전을 봐서 알겠지만 그 전시를 보기 위해 길게 줄 섰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호기심에 미술관을 찾았을 것이고, 사실 전시의 품질을 따지자면 '편하게 기획한 전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늘 잘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면서 공간의 특성을 잘 살린다면 좀 더 좋은 전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