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KBS교향악단 802회 정기공연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근대 독일 최후의 낭만파 교향곡 작곡가이며 저명한 지휘자였다. 6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5살에 빈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공부했다. 이 무렵 빈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 음악사 강의도 들으며 칸트, 쇼펜하우어, 헬름홀츠,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9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많은 가곡과 오페라를 남겼다. 특히 교향곡에서는 관현악법을 확대하고 구성을 거창하게 만들어 대규모의 연주 형식을 취하게 했고, 교향곡 편성에 성악을 추가했다.
이 같은 말러 교향곡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교향곡 3번이다. 전체 6악장, 연주시간이 약 100분에 이르는 대곡으로 말러 교향곡 가운데 가장 길고, 인간의 삶과 존재의 신비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표현하고 있다. 4악장과 5악장에는 독창과 합창도 들어간다. 그래서 웬만한 지휘자나 오케스트라는 잘 엄두를 내지 못한다. 피에타리 잉키넨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은 5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가진 제 802회 연주회에서 아주 높은 완성도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다.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정격 출력’에 가까워 전반적으로 무겁고 두텁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날 말러 교향곡 3번 연주에서 오케스트라의 특성은 ‘중후장대’한 곡과 어우러지면서 제대로 장점으로 전환됐다.
말러는 이 곡을 1895년 6월 초에 시작했다. 여름휴가를 위해 즐겨 찾는 오스트리아 슈타인바흐의 아터호수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터호수의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 특히 푸른 초원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들꽃을 보고 그 꽃의 찬란한 생명력에 영감을 받았다. 여름 내내 10주 동안 1악장을 제외한 교향곡을 작곡했고 이듬해인 1896년 여름 마지막 1악장까지 작곡했고 가을에 최종 스코어를 완성했다.
“이 곡은 진화의 모든 단계를 하나씩 하나씩 거친, 음악으로 쓰인 한 편의 시(詩)입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자연’으로 시작해 ‘신의 사랑’까지 발전합니다.”(말러)
말러의 말처럼 1악장(힘차고 단호하게)은 생명 없는 죽음과 혼란으로 가득해 보인다. 8대의 호른이 우렁차게 소리를 내며 거대한 교향곡이 시작한다. 트럼펫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둡고 음산한 고요함 속에 클라리넷이 날카롭게 외쳐대다가 어느새 모든 악기가 총 출동해 거대한 행진곡풍을 연주한다. 오보에는 흥에 겹고 심벌즈, 트라이앵글 등 타악기가 어울려 불규칙하게 뒤섞인다. 각각의 악기가 독자적인 소리를 내는 까닭에 무질서한 듯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질서와 조화를 찾아가는 느낌을 잘 살렸다. 37분간의 연주는 화려하고 강력하게 마무리 된다.
2악장(매우 적당하게)은 초원에 펼쳐진 아름다운 들꽃을 연상하게 한다. 목가적인 오보에 소리는 들꽃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고 이어지는 현악기의 연주는 부드러운 바람에 흘러나오는 꽃향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3악장(서두르지 말고)은 숲속의 수많은 동물들이 들려주는 예측불허의 역동적인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악 중반부에 무대 밖에서 연주하는 플뤼겔호른 소리가 아주 맑게 들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 한 호른소리와 함께 야생의 역동성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 하다가 다시금 맹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화려한 피날레로 나아간다.
신화적 카오스와 자연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 교향곡은 4악장(극히 느리고 신비롭게)에서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말러는 4악장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인간의 상태와 존재 깊이에 대한 성찰을 다룬 ‘심야의 음침한 노래’의 텍스트를 가져왔다.
1시간 가까이 무대에서 정좌하고 있던 오카 폰 데어 다메라우 (Okka von der Damerau) 가 일어서 자세를 가다듬고 ‘오 인간이여!’라며 정적을 깬다. ‘동시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라는 수식어가 헛되지 않게 다메라우는 부드러운 알토의 목소리로 니체의 시구를 담담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표현했다.
강한 중음역대와 명료하고 자연스러운 발음이 흡인력이 있었다. 호른, 현악기, 오보에, 바이올린 솔로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다메라우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노래한다. ‘고통이 말하길,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으로 향하려 하나니! 깊고 깊은 영원을.’
저음악기들이 등장하면서 조용히 밤의 산책이 끝나고 분위기가 훨씬 밝은 5악장(익살스러운 템포로 거리낌 없이)이 이어진다. 영롱한 종소리와 함께 어린이 합창단(고양시립 소년소녀합창단)이 맑은 목소리로 천상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밝고 유쾌한 합창단(고양시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이 ‘세 천사가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라며 노래한다. 인물과 가사의 개성을 살리는데 능숙한 디메라우는 이번에는 베드로 역할을 맡아 노래한다. 예수와의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결국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희망적인 내용을 다룬다.
바로 이어지는 6악장(느리고 고요하게 풍부한 감정으로)은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공간을 채운다. 하지만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아서 고통과 갈등이 찾아온다. 호른과 바이올린이 요동치다가 심벌즈가 울리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불행 또한 끝이 있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청아한 플루트와 피콜로, 트롬본에 이어 부드러운 첼로의 선율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다가 두 대의 팀파니가 가슴을 울리는 가운데 곡은 느릿하면서도 장대하게 끝을 맺는다. 치밀하게 구성된 서사시와 같은 이런 곡을 쓴 말러는 역시 ‘천재’다.
2022년부터 제 9대 음악감독으로 KBS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피에타리 잉키넨은 매우 섬세한 지휘자다.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현악 파트를 밀도 있게 이끌었으며 대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에서 금관, 목관, 타악기 하나하나의 역할과 특성을 제대로 살려 냈다. 이날 현악부의 연주는 특히 우아하고 섬세했다. 무대 뒤로 나가서 연주했던 남관모 트럼펫 수석을 비롯해 관악 파트도 소리가 무척 맑아진 것 같았고 늘 그렇지만 타악도 좋았다. 악장 마르쿠스 볼프(바이레른슈타츠호퍼 악장)를 비롯해 플루트(유지홍), 클라리넷(조성호), 호른(미샤 그뢸), 트롬본(조나단 램지) 등 객원수석들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며 오케스트라의 감동을 촘촘하게 채워주었다.
이번 말러 교향곡 3번은 지난 2017년 요엘 레비 지휘로 714회 정기연주회 이후 7년만이었다. 올해 다른 교향악단이 말러 교향곡 연주를 레퍼토리로 정해 놓고 있지만 3번을 연주하는 곳은 KBS교향악단이 유일하다. 그만큼 모두가 단단히 각오를 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춰 무대에 섰을 것이다. 이번 만큼은 KBS 교향악단이 ‘대한민국 교향악단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기억에 남을만한 연주였음이 틀림없다.▣
컬처램프 기사보기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1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