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노마드 함혜리 Nov 29. 2024

추천전시] 노스탈지_'임응식 :아르스 포토그라피카'

2024.11.9~2025. 1.24, 예화랑 창덕궁점

한국 1세대 사진작가 임응식(1912~2001)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고개를 숙인 채  구직(求職)이란 팻말을 허리춤에 묶고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의 사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1953년 명동거리 풍경을 찍은 이 강렬한 사진 한장으로 인해 임응식을 흔히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사회성 강한 작가로 인식한다. 하지만 '한국 1세대 리얼리즘 사진의 원조'로 불리는  그가 남긴  다른 작품들을 보면 피사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스했음을 알 수 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기 보다는 예술적 감성이 진하게 묻어나는 사진들이다.

임응식, '초연 속의 성당' (1950, 인천 답동성당) , 사진 예화랑 제공


“사진의 생명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진실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진의 생명이고 힘이다. 사진은 시대 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임응식)

일제 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굴곡진 역사를 겪고, 한국전쟁 때 종군 사진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임응식이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사진들은 당시 그가 처한 참혹한 현실을 꾸밈없이 담아냈다. 그는 현장을 ‘리얼하게’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담았다.  임응식의 따뜻한 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는 '임응식: 아르스 포토그라피카' 전이 예화랑 창덕궁점 오픈 첫 전시로 11월 9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열린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예화랑 설립자인 모친(고 이숙영 대표) 께서는 1978년 인사동에서 화랑을 시작해 1982년 강남구 신사동으로 옮겨 2010년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까지 많은 전시를 열었고, 또한 수많은 근현대 작가들과 교류했다"면서 "지난 해 45주년 전시를 준비하면서 대부분 근현대 작가들과 작업실 사진을 임응식 선생님이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의 손자 임상철 선생이 아카이브를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임응식 작가를 재조명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아르스 포토그라피카(ars photographica) 에서 아르스(ars)는 예술을 뜻하는 라틴어로 영어 art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사진가 임 응식이 1946년 피란 수도였던 부산에서 연 그의 사진 현상소 이름도 ‘아르스(ars)’였다. 김 대표는 "좁게는 인간의 기술의 연마를 통한 미적 표현, 넓게는 인 간의 창조적인 모든 활동을 뜻하는 ‘예술’이야말로 임응식의 삶 그 자체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의 예술(ars), 그리고 사진(photographica)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의 궤적을 따라갈수록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임응식, 명동부감明洞俯瞰(명동,1954), 사진 예화랑 제공


예화랑 창덕궁점 오픈 첫 전시 '임응식:아르스포토그라피아 ' 전시 전경 (사진 함혜리 )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근대화 과정을 지내온 그는 발로 뛰면서  한국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었고, 그 결과 그의 사진들은  따뜻한 리얼리즘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일제 강점기)  작품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의 폐허에서 일상을 찾아가는 모습을 담은 1950년대 사진들 위주로 전시된다. 임응식이 촬영하고 직접 인화 후 사인을 한 사진들이다.  부산과 서울, 인천의 풍경을 주로 담은 사진들로  지금은 사라진 장소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들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해방직후에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았던 때에 필름과 인화지로 시도했던 추상작품 3점도 포함되어 있다.  2층에는 작품과 함께 그의 연보를 보여주며 3층에는 임응식 작가가 사용했던 카메라와 그가 정리하고 소장했던 사진첩, 사진 작품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응식 , 작렬(炸裂),Limbsgram,1945, 사진 예화랑 제공
창밖으로 비원이 바라보이는 예화랑 창덕궁점 3층에는 임응식이 사용했던 카메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함혜리)


1955년 미 국 사진연감(Photography Annual)에 수록된 작품 <나목>(1953,부산)은 그의 신조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앙상하게 불타버 린 나무 사이에 홀로 서있는 소년의 남루한 모습은 전쟁의 피폐한 사회상을 그대로 드러 냈으나, 그는 불타버린 ‘고목(枯木)’이 아닌 그저 잎이 떨어진 ‘나목(裸木)’이라고 제목을 붙여,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나고 나무는 다시 이파리가 돋아날 미래를 꿈꾼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임응식, 나목(裸木)(1953), 사진 예화랑 제공

임응식은 1931년 사진가로 첫 출발을 한 이후 2001년 지병으로 타계할 때까지 임응식이 평생에 걸쳐 찍은 사진은  8만여 장에 이른다. 그 사진에는 인간과 그 이면의 삶을 진실되게 표현하고자 노력한 그의 올곧고 따뜻한 시선이 집약되어 있다. 거리의 한 모퉁이 를 찍더라도 그 거리에 서려 있는 이야기를 담고, 건축물을 찍으면서 그 안에 담긴 전통 과 역사를 표현하고자 했던, 날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생명력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임응식, 연인(1955) (사진 예화랑 제공)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난 임응식은 일본 와세다 중학교(1926~1931) 입학선물로 큰형으로부터 박스 텡고르(Box Tengor)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34년 일본 도시마 체신학교 졸업 후 강릉 우편국에 근무하며 강릉사우회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하고 전시도 했다. 도쿄 물리탄광주식회사에서 과학사진을 담당하던 중 해방을 맞은 그는 1946년 부산 대교로에서 사진재료상이자 사진현상소 '아르스'를 운영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보도사진반원으로 종군해 미공보원 주최 '경인전선보도사진전'을 부산 USIS화랑과 광복동 거리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사진’사’가 아닌 사진’작가’로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저 ‘사진사’로 불렸던 시절 임응식은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1952년 ‘사진작가협회’라는 이름의 협회를 결성했고, 사진예술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딛고 문화단체 총연합회(문총)에 가입했으며, 이후 12년에 걸친 고난 끝에 대한민국미술전 람회(국전)에 사진 부분이 생겨났다. 또한 그가 1957년 미국의 전설적인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에게 직접 연락한 끝에 경복궁 미술관에 유치한 <인간 가족전>은 당시 30만 명이라는 천문학적 관람객을 모아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임응식 (1912-2001)


이후에도 그는 대학의 사진 전공 개설에 힘을 보태고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매일 ‘마라톤을 하듯’ 거리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그의 전쟁 이후 폐허에서 유행의 집결지로 변신하기까지 명동의 50년 변천사를 보여주는 <명동점경(明洞點景)>, 문화 예술계 주요인물들 150여 명의 얼굴을 담은 <풍모(風貌)>, 경복궁과 종묘, 비원 등 한국 의 전통문화유산을 알리고자 했던 <한국의 고건축> 등은 모두 우리 사진 역사의 소중한 보물로 남았다.


이 글은 컬처램프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197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