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12월 7일 , 원주 뮤지엄 SAN
‘숯’을 매개로 동양적인 조형성을 담은 드로잉과 조각 작업으로 세계적인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이배(70). 그가 6일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산)에서 맨발로 흙을 밟고 섰다. 그의 고향 청도에서 가져온 흙이다. 손에는 싸리 빗자루가 들려 있다.
“전시회를 이렇게 빗자루로 흙을 쓸면서 시작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감동적이고 의미가 깊습니다. 제가 걸음마를 이 황토흙에서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저는 빗자루로 흙을 쓰는 일이 붓으로 그림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작업해 왔던 것 같습니다. ”
뮤지엄산에서 열리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안아땅당) : 기다리며》의 개막 하루 전 열린 프레스프리뷰에서 빗자루로 고향의 흙을 빗자루로 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작가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저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고 제게 의미가 있는 행위”라며 “제 고향 청도에서 가져온 흙을 논 모양을 축소한 것이고, 자연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전시 끝날 때까지 풀이 자라고 생명체가 성장하는 자연의 순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작가는 싸리 빗자루로 붓질하듯 땅을 휘저었다. 뒤편 9m 높이의 스크린에서는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어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도 작가는 이번 전시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것,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전시라고 강조했다.
“외국에서 떠돌이처럼 40년을 살면서 작업했습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근원부터 다시 돌아보는데 집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작가로서 무엇을 꿈꾸었는지 나의 삶 전체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4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계속되는 전시 《En attendant(안아땅당) : 기다리며》는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숯’이라는 매체에 천착해 작업해 온 이배 작가의 30여 년 예술세계를 조망한다. 이번 전시 제목에 대해 작가는 “기다림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일종의 염원”이라며 “완결되지 않고, 부족하고, 모자란 아쉬움을 가진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3년 전 전시 제안을 받은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십 번을 뮤지엄산에 와서 안도 타다오가 만든 공간을 보며 어떤 작품을, 어떻게 설치해야 할지를 고민했다는 그는 “내내 자신이 없었고 절망적이며 캄캄했다. 내가 예술가라고 하지만 예술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언젠가 올 그날을 ‘기다리며’ 나를 근원부터 돌아보는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했다”고 털어놨다.
이번 전시는 30년에 걸친 작업을 중심으로 숯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조망한다. 공간, 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뮤지엄산 전체에 작가의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 영상작품 등 39점이 선보인다. 작가는 한사코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전례 없는 스케일과 깊이를 담은 작품들은 오랜 시간 축적된 작가의 역량이 드디어 이곳에서 폭발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전시는 뮤지엄 SAN의 핵심 철학인 ‘Space-Art-Nature’를 기반으로 건축적 동선과 작품의 내적 서사를 긴밀하게 결합하며 구성됐다. 특히 공간 구성과 작품 흐름을 통해 이배의 작업이 지닌 물성과 정신성의 전개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본관 입구에서 시작해 갤러리 로비와 총조갤러리 1,2,3을 거쳐 야외 ‘무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개의 공간을 따라 이동하며 하나의 유기적 경험을 완성하게 된다.
우선 미술관 입구에 놓인 ‘불로부터’(Issu du feu)는 높이 8m, 폭 5m, 무게 7t에 달하는 숯 기둥이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숯은 전통적으로 정화와 치유를 상징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산불이 많이 나면서 자연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며 “우리는 이런 재앙으로부터 회복되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청조갤러리 로비에는 신작 ‘붓질 Brushstroke’ 16점이 입체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전시장을 벗어나 자연의 빛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에 배치되어, 거대한 붓질로 이루어진 풍경 속을 직접 산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청조갤러리 1, 2는 ‘White’와 ‘Black’ 공간으로 펼쳐진다. 이배의 작업에서 검정은 빛을 모두 흡수하여 수많은 색을 품고 있는 심연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상태다. 반대로 흰색은 여백과 빛, 그리고 열려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두 색은 서로 대립하기보다 동양적 사유에서 말하는 음양의 균형처럼 상호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흰색 공간은 바닥과 사방을 새로 배접 하듯이 흰색으로 도배한 흰색 공간에 그려지지 않은 한지, 조각되지 않은 흰색의 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맞은편 벽면에 약 3만 5천 개의 스테이플러 심으로 붓질의 흔적을 만들어 놓았다. 새벽 4시에 작업한 것이다. 작가는 “안도의 공간을 무척 좋아한다. 그가 설계한 공간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백색의 공간을 만들었다”면서 “공간의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 흰색 벽에 핀이 박히면서 물성과 비물성이 만나는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검은색 공간에서는 숯으로 한 다양한 작업을 만난다. 숯덩어리를 쌓고, 바닥에는 붓질을 했다. 숯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에 설치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쌓은 것이다. 붓질에서 보이는 것은 모두 같은 검은 숯처럼 보이지만 잣나무, 포도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만들어진 숯 가루로 그린 것이다. 작가는 “여러 나무가 있는 숲을 그리듯이 하나하나 다른 숯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맞은편 벽에는 다양한 숯을 채운 가로 10.4m 크기의 초대형 평면작업이 설치됐고. 브론즈로 된 조각도 설치되어 있다.
앞서 작가가 퍼포먼스를 했던 청조갤러리 3의 ‘Becoming’은 영상과 설치작업으로 농부의 아들로 성장한 작가의 정체성을 반영한 공간이다. 9m 높이의 스크린에서는 논 위에서 직접 붓질하는 영상과 청도에서 옮겨온 흙으로 구현된 논 설치를 결합해 보여준다. 전시 기간 동안 실제로 성장하는 식물과 영상 속 행위는 땅·신체·시간의 순환적 관계를 드러내며, 작품을 고정된 대상이 아닌 생성의 과정으로 경험하게 한다.
마지막 야외 전시장 ‘무의 공간’에는 주변의 나무와 건축 지붕, 그리고 산세의 높이와 호응하도록 설계된 10m 높이의 브론즈 ‘붓질 Brushstroke’ 6점이 배치되어 있다. 산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흐름 속에서 작품 사이를 거닐다 보면 새소리도 들리고 음악도 흘러나온다. 자연과 건축, 조형이 하나의 확장된 풍경으로 결합되는 잊지 못할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곳을 이번 전시에 가장 어울리는 작업으로 꼽았다.
“야외에 조각을 두면 전경을 해칠까 걱정이 되는 나머지 선호하지 않지만 어색하고 생소하더라도 예술이란 그런 것이니까 용납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조각 뒤의 산들과 어우러지면서 관람객들이 자연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배 작가는 1956년 청도에서 태어나 1982년 홍익대를 졸업한 후 198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30여 년 간 ‘숯’을 매개로 동양의 정신성을 표현하는 작가로 세계적 반열에 올랐다. 숯을 사용하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했을 때 드로잉을 하기 위해 목탄 대신 바비큐용 숯을 사서 썼고,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의 기자가 작업실을 방문한다기에 ‘검은 먹으로 자연을 표현하는 동양에서 왔기 때문에 숯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찾아낸 것에서 시작됐다. 숯은 고성 산불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다르게 다가왔다.
작가는 “고성 산불 현장에서 산을 오르는데 재가 무릎까지 들어갈 정도로 모든 것이 다 타 있었다. 그런데 그 땅에서 개미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그 생명력에 너무 놀랐다. 고목들이 숯이 되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보며 이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숯에 담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