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용인 호암미술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시골(원산)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냥 자연이에요. 자연이 다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70여년 간 집요하게 나무를 재료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본질을 탐구해온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의 대규모 회고전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이 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린다. 호암미술관 최초의 한국 여성 작가 회고전으로 자연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삶과 예술을 하나로 이어온 김윤신의 예술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 전시에서는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 판화부터 실험적인 평면 작업, 나무 조각, 돌조각, 60대 이후 몰입한 다채로운 회화와 코로나를 계기로 만들어진 채색 조각까지 170여 점을 통해 김윤신의 예술 세계를 조망한다.
3월 11일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프레스 프리뷰에서 작가는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던 것도, 이번에 이렇게 호암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갖는 것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평생을 작업해 온 나무는 그에게 무엇인지를 묻자 "나무는 바로 나"라며 "나무로 작품을 하는 것은 곧 나를 남기는 것"이라고 답했다.
" 2차 대전이 나니까 원산 앞바다에 폭탄이 떨어지고 막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 나무들 중에서 소나무가 다 거꾸로 쓰러져 있었어요. 송진을 채취해 가느라 그렇게 된 거였는데 어린 마음에 내 친구인 나무들이 그렇게 쓰러진게 안타까웠어요. 버려진 나무로 작업을 해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
1935년 생, 올해 만 91세인 작가 김윤신은 "지금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작업한다. 내 영혼과 육신이 작업하는 마음으로 하나 돼 집중하면서 작업한다"면서 "다만 젊을 때는 어떻게 형태를 만들어 낼지에 집중했다면 나이 들면서는 내 속의 예술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격동기에 성장하고 전후의 척박한 예술 환경 속에 작가로서 자리매김한 김윤신은 한국 근현대 역사와 미술의 산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상명여대 교수를 지내던 그는 오직 좋은 재료(나무)를 찾아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작가는 "비행기에서 보니까 산은 없고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는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작업을 하게 됐는데 작업실은 없고 나무는 생각보다 너무 단단해서 전기톱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한 손에는 나무, 다른 손에는 전기톱을 들고 여전사처럼 아르헨티나의 자연 속에서 창작에만 몰두하며 현대성과 원시성이 공존하는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발전시켰다. 그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내 생각과 내 정신력,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이렇게 여기까지는 올 수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작업이 너무 힘든 거예요.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그게 보통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반드시 해야 된다, 그것을 이겨내지를 못하면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남미의 아주 강한 그 재료들로 40년을 작업한 거죠."
1955년 홍익대 조각과에 입학해 70여 년을 예술에 헌신해온 김윤신이 현재까지 제작한 작품은 평면과 입체를 아울러 1500여점에 이른다. 몇 차례 회고전을 하고도 남을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가운데 고르고 골라서 대표적이고 의미있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의 부제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잘 알려진 김윤신의 작업 이념에서 따온 것으로 작가와 재료가 하나가 되어(合) 작품이라는 또다른 하나가 탄생(分)한다는 의미이다.
"조각을 하기전에 나무를 오랜 시간 살펴요. 그리고 나무와 내가 하나가 되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톱을 들고 나무 안에서 공간을 찾아내고 형태를 이끌어 냅니다. 작품을 하기 전에 드로잉을 하지 않고 오로지 직관적으로 재료와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작업을 합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김윤신의 작업을 하나의 조형 세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평면과 조각이 한데 어우러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1층 전시실은 1970년대 중후반의 '기원쌓기' 조각 시리즈와 ‘합이합일’ 이념이 형성되던 1980년대 중반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시리즈로 시작한다. 기원쌓기 연작은 마치 마을 어귀의 장승을 축소해 놓은 모습이다. 통나무에 틈을 내고 끌과 자귀로 다듬어 만든 조각으로 나무 본래의 굴곡이 살아있고 껍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나무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새벽이면 작가를 데리고 산에 가서 작은 돌을 하나 찾고 그 위에 촛불을 켜고 기도했던 것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돌과 나무를 쌓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작가의 다양한 추상적 형식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1960년대 파리 유학 시절의 석판화와 드로잉, 1970년대의 캔버스 작업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때로는 유기적이고 때로는 기하학적인 자유분방한 평면 추상 작업과 그의 조각을 함께 조망함으로써, 장르의 경계를 넘어 일관되게 펼쳐진 조형적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후, 전기톱을 사용해 남미의 육중한 나무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더욱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절정에 이른 작가의 예술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1984년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4-84'(개인소장)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직후 이듬해 개인전을 열 기회를 갖게 되면서 길거리에 임시 작업장을 만들고 전기톱을 사서 빠르게 작업을 시도했던 작품이다. 나무 껍질이 그대로 남아 거칠지만 나무의 본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윤신은 전기톱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며 거칠게 마무리했던 작품에서 금새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조형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4-11)으로 변모하며 자신만의 조형성을 다듬어 갔다.
짙은 나무향이 가득한 전시장에서는 알가로보, 라파초 등 이름도 생소한 아르헨티나의 다양한 나무들이 작가의 거칠고 빠른 전기톱질을 거쳐 새로운 생명력을 품은 관람객을 맞이 한다. 어떤 것은 묵직한 삶의 고민을 담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철학자 같고, 어떤 것은 나비가 날개를 편 것처럼 보인다. 한복 저고리를 입고 사뿐하게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한옥의 처마처럼 살짝 올라간 것도 있다.
구겐하임에 소장된 작품도 이번 전시를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김윤신은 "이번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 모두가 내게는 너무 중요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구겐하임 소장 작품"이라면서 "작품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공간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길에서 전기 톱으로 사이즈를 줄여 옮겼던 경험이 작품과 함께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2층 전시실에서는 김윤신 조각의 또다른 축인 돌조각과 함께, 2000년대 이후 다채롭게 변화하며 전개되는 나무조각들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원주민 마푸체(Mapuche) 부족의 색채와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기의 조각은 아르헨티나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해 더욱 풍부하게 확장된 김윤신 예술의 양식적 발전을 잘 보여준다.
김윤신은 1989년과 2001년 멕시코와 브라질 오지의 채석장에 장기간 체류하며 돌조각 제작에 몰두했다. 김윤신에게 돌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한 자연의 재료였다. 예닐곱시간 걸려 돌을 자르고 잘라낸 돌을 정과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찾아가고 표면을 다듬는 작업은 나무를 다룰 때와 차원이 다른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작가는 90여졈의 돌조각을 완상했다. 돌 자체의 거친 표면, 작가의 작업 흔적, 돌 내부의 자연 색상과 무늬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또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2020-45'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외부 활동이 제한됐던 2020년에 만들었다. 재료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에 남은 폐목과 주변 건축 폐자재에 회화를 결합해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선보였다. 추상화를 입체적으로 구성한 듯한 조각적 회화, 혹은 회화적 조각의 형태를 이룬 작품들이다. 작가는 "집에만 있다 보니 어릴 때 나무에 그림도 그리면서 하던 장난이 떠올라 그 마음으로 나무에 그리기 시작했다. '회화 조각'이라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세상을 떠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2층 전시장에는 2000년대부터 김윤신이 열정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한 주요 회화들도 함께 선보인다. 회화 작업들은 조각과는 또다른 형식으로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와 삶의 환희를 읽을 수 있다.
2층 전시장 외부에는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가 설치되어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안데스산맥의 웅장한 생명력을 담아낸 2013년 작 '2013-16'을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 뒤 아크릴 채색을 더한 작품으로 작가가 ‘회화-조각’이라 명명하며 새롭게 몰두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 중 하나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유연하게 확장하는 90세 노장의 예술적 열망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수석큐레이터는 "김윤신의 예술은 아시아와 유럽, 남미를 가로지르며 두 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다"면서 "한국적 감성과 동양적 사유를 기반으로 순수 추상의 조형원리를 발전시키고, 남미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하며 구축된 매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그의 작업 기저에는 어린 시절 경험한 우리의 민속 신앙, 작가의 기독교적 신념이 이질감 없이 공존하며, 원시적 조형성과 현대 추상의 조형언어가 시간을 초월해 서로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구순(九旬)을 넘긴 작가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한국과 아르헨티나에서 제작되는 등, 그의 예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최근에도 지속되고 있다. 전시장에서는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감독 임선애의 김윤신 다큐멘터리를 만날 수 있다.
호암미술관 강당에서는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3월 27일(금)에는 김윤신 작가가 자신의 삶과 작업을 돌아보는 아티스트 토크가 열린다. 4월 24일(금)과 5월 15일(금)에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중강연을, 6월 13일(토)에는 한국 조각사와 아시아, 남미에서의 모더니즘 안에서 김윤신 작업의 의미를 조명하는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모든 프로그램은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참여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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