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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Sep 22. 2021

할머니의 일

<할머니의 사계절>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이장 일을 했어. 이장 6년 하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시고 내가 서른한 살에 혼자가 됐잖나. 딴 거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데 내가 솜씨는 있었는 모양이래. 나는 보기만 해도 만들 수 있거든. 그래서 혼자서 생각해가지고 바느질을 했다. 열네 살쯤 됐나, 나도 부모가 일찍이 돌아가시고 그랬으니까 그냥 누가 하는 거 보고 따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내 바느질이 이쁘다고 난리를 치고 모두 그랬어."



할머니는 한복을 만드는 분이셨다. 서른한 살에 시작된 바느질은 40년이 넘게 이어졌다. 할머니는 재봉틀로 삼남매와 손녀딸을 키웠다. 할머니의 회색 부라더미싱을 기억한다. 그 둔탁하고 힘 있는 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하다. 할머니에게 그의 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바느질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꾸만 자식 이야기로 빠졌다. 유난히 작게 태어난 고모에게 돈이 없어 죽 같은 것만 겨우 먹였다고,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신다. 할머니는 삼남매를 먹여 살리는 가장인 동시에 엄마였다. 지금의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았을 할머니는 그 일을 어떻게 다 해냈을까. 그에게 '일의 의미'를 묻는 일이 아득해진다.





"그래도 바느질 잘 한다고 소문 나갖고 재산장, 명호장 다 갔잖나. 밤새 히떡 새워가지고 바느질 해놓으면 장사꾼들이 아침에 한복 찾아가고 그랬다고. 나는 또 바느질한다고 시작하면 때를 맞차 밥을 안 먹고 그거를 끝내야 마음이 편하고 그래 살았다. 내가 허리가 이런 것도 사무 구부려 앉아가지고 이래 하이까는... 그래도 나는 한복이라고 하면 엔간한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쁘게 잘 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소매가 둥그스름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빼쪽하게 해서 입고 그러니까는 옛날 옷이 태가 더 낫드라."



할머니가 만든 한복은 근사했다. 치마를 만드는 데는 반나절이 걸렸고, 저고리를 짓는 데는 하루가 걸렸다.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할머니는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한 한복을 만들어냈다. 유치원 발표회 때 할머니가 만들어준 한복을 입고 갔다. 유난히 알록달록한, 기성품과는 다른 디테일이 있는 내 한복이 조금은 튀지만 마음에 들었다.


그 시절 유치원 꼬마가 이제 서른이 되었으니 할머니의 등도 세월만큼 많이 굽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일을 하신다. 한복 짓는 일은 이제 수요가 별로 없고 눈도 침침해서 못하게 되었다. 대신 나라에서 노인 일자리로 제공하는 환경미화 일을 하신다. 이제는 일 좀 그만하고 편하게 사시라도 해도 할머니는 어물쩍 말을 돌린다.





"요새는 얼마나 편하노. 일은 밭에 하던 거이까네 이력으로 하잖나. 풀 밭 매야 되고 더울 때는 애먹어 애먹기는. 근데 장갑하고 토시하고 거기서 다 나오거든. 허리에 차고 앉는 거랑 호미도 갖다주고 모자랑 조끼 그런 게 다 나온다꼬. 요새는 두 시간만 딱 하면 집에 와. 옛날에 집에서 내 일을 하면 죽도록 하는데 거기 나가서 하는 거는 노인들 시키는 거라 많이 안 시키거든. 그래 벌어갖고 쌀도 사다 놓고 병원도 가고... 돈 벌어 쓰니 너무 재밌잖나."  



돈 벌어 쓰니 너무 재밌다는 할머니 말에 정신이 얼얼했다. 나는 할머니의 일을 고된 노동일 뿐이라 생각했다. 예상과는 달리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가볍고 자유로웠다. 그렇다. 할머니의 '일'에는 중요한 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는 지금에서야 당신을 위한 돈벌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한 달에 8일 하루에 2시간씩 일하고 받는 27만원의 돈. 그 돈을 온전히 본인이 필요한 곳에 쓰는 것이 너무 재밌다고 한다.

나의 자랑스러운 할머니 앞에서 '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말끔히 의미를 잃었다. 할머니의 성과는 잘 큰 삼남매와 손녀딸이었고, 할머니의 보람은 작지만 고스란히 소유할 수 있는 품삯이었다.





"돈 만지니께네 좋고, 오래 일을 계속해야 되지."



나는 할머니의 일의 의미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무엇이든 보면 만들어냈던, 고운 비단 위를 오가던 거친 손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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