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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Sep 22. 2021

위대한 받아쓰기

<할머니의 사계절>




"경기도~" (쩌렁쩌렁)

"경..기..도 (속닥) 가만 있어라 보자. 내가 다시 불러볼꺼이"


할머니는 내가 이사를 갈 때마다 받아쓰기를 한다. 몇 년에 한번 하게 되는 이 받아쓰기 시간이 나는 달갑지만은 않다. 할머니의 듣기 실력이 눈에 띄게 낮아지는 걸 보는게 슬프다. 그 잠깐을 못 참고 답답함을 드러내버리는 나 자신도 밉다. 할머니가 어떤 용기로 전화를 걸어왔는지 잘 아는데.


"황록수 아파트~?"


한참 받아쓰기를 했는데 완전히 다른 단어 조합이 나와서 빵 터져버렸다. 수박 할 때 수~ 라고 설명하는 흔한 방법이 할머니한테는 너무 어려운 접근이었나 보다. 우리는 겨우겨우 30여 글자를 완성해냈다.


어릴 적 시골 집 달력에 있던 할머니 글씨가 기억난다. 하나도 맞춤법에 맞는 것들은 없었지만 할머니는 꼼꼼히도 기록했다. '씨 숨는 날' 씨앗 뿌리고 심는 날이다. 사투리 발음 그대로 적힌 그 단어들이 그립다. 이 많은 감자는 어디서 다 캤는지 모르겠지만 옥수수가 있던 자리, 부추가 있던 자리, 고추가 있던 자리는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땅 위에 나 있던 것만 기억이 나네. 요즘 들어 할머니가 많이 궁금하다. 미안하고 보고싶고 애틋하다.


당분간 할머니와 다시 받아쓰기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할머니가 보내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이 많은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또 내가 맛있게 잘 먹는 일. 바쁘다 핑계대지 말고 부지런히 먹어야지. 오늘은 입추라는데, 나는 완연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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