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영원히 미소
월세, 약값, 담배, 위스키.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미소'가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새해가 되자 월세도, 담뱃값, 위스키 값도 오른다. 끝없는 계산 끝에 미소가 그중에 포기한 것은 다름 아닌 집.
당분간 지낼 곳을 구하기 위해 대학교 시절 밴드를 같이 했던 5명의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 주부가 된 친구, 이혼해 매일 술 만 마시는 친구, 시집 잘 간 친구, 온 가족이 며느리 찾기에 혈안인 친구. 모두 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저마다 사회적 존재로 존재하기 위해 다분히 살고 있기에 미소를 거둬주지 못한다.
우리가 이쯤에서 드는 생각. “차라리 담배나 위스키를 끊지..” 그러나 미소에게 취향은 자기 존재를 일깨우는 상징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하고, 살게 하는 힘. 반면에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인적 취향에게서 애써 눈을 돌렸나요.
본래 가난은 잔인해서 취향마저 간섭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그 마음의 끌림에 염치를 들이미는 가난.
울지 않는 미소가 그저 대견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번째 선택지인 약값마저 포기한 듯한 백발의 미소를 보며 우리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여전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한 번쯤은 누구나 소공녀 시절을 겪었다. 나 또한.
돈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집
첫 번째 집에 살던 그 봄에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민하는 사이, 나도 빌려서 쓴 우산을 누가 훔쳐가고 없었고, 3년 쓴 핸드폰도 드디어 고장나버렸다.
두 번째 집에서는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커피 포트에 물을 세 번 끓여 나눠 씻었다. 한 번은 세수, 한 번은 머리 감기, 한 번은 샤워.
다섯 번째 집의 공무원 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TV를 켤 수 없고 거실 컴퓨터를 쓰지 못했다. 그 집 여자 넷에 나까지. 아침에 씻으려면 앞선 여자들을 차례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집 아버지는 안 방에 딸린 전용 화장실을 썼다.
마지막 날 밤에 울다가 결국 소리가 터져 나와서 밖에서 울려고 현관을 나서는데 그 집 세 자매의 큰 언니가 나왔다. 남의 집에서 밤에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냐며 나를 경멸했다. 그녀는 나보고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다 했다. 이미 울음이 터진 나는 어떤 이성적인 반박도 하지 못 하고.
여섯 번째 집은 화목한 부잣집으로 그 집 아버지가 몇 달간 출장을 간 사이 엄마와 딸만 사는 집에 내가 묵게 되었다. 밤마다 들려오는 가족들의 애틋한 영상통화. 그리고 조용한 주말 아침에 들려오는 느긋한 라디오 소리. 초봄에 거실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 이질적인 배경 속의 나는 잘 못 삽입된 그림처럼 물끄러미 허공만 바라보았다.
비밀이지만 나도 미소처럼 그 집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했다. 집안 공기가 따뜻해서 재빨리 씻지 않아도 되었다. 샤워가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집 곳곳이 퍼져있는 여유로움과 다정함이 나에게 넌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오열하던 날 거실에서는 큰 음악 소리와 함께 그 집 딸과 친구들이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나를 나가라고 쫓아내는 굿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일곱 번째 집은 체구도 작은 내가 옆으로 돌아누우면 코 앞에 양 쪽 벽이 있었다. 고작 입주 첫날 저녁에 나는 무한도전을 틀어놓고는 또 울었다.
약
일주일에 네 군데의 병원을 다녔던 그 때의 나. 그 중 하나의 내 진단명은 이관 개방증으로 내 몸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 가령 내 목소리, 침 삼키는 소리, 내 몸을 조금 두드렸을 때 통통, 하는 소리 같은 게 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또 다른 나의 진단명의 각막 손상과 아벨리노 증후군. 언젠가 자고 일어났는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가 내 양 쪽 눈을 칼로 찌른 것처럼 너무 아파서. 눈에 샴푸나 라면 수프 같은 게 들어간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동그란 안구 전체가 찢어질 것 같았다.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곤 했다.
다녔던 병원 모두 집과의 거리가 멀고 대기시간도 길었다. 괜히 만성환자들이 예민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많은 게 아니다. 일주일에 병원을 서 너 군데를 예약하고 가서 진료를 기다리고 약을 타는 과정, 그리고 그럼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는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미소에게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담배, 위스키. 남자 친구.
나에게는 셋 다 없었다. 그리고 매일 울었다.
울지만 않으면, 눈물만 안 나면 뭐라도 해보겠는데.
시도 때도 없는 눈물과 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말하는 듯 했다. 새로운 시도는 하지 마. 넌 곧 이 세상에서 마무리될 거야. 어쩐지 이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도 잘 안 나는 예전이 되었다.
올해부터 내 약값이 무슨 무슨 사업으로 인해서 올랐다고 한다. 약을 포기해 백발이 된 미소의 머릿결과 함께 괜히 백발이 된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