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그 덩어리라 부르는 것에 대하여
1
우리가 찾은 책 속 첫 모순은 주인공 스물다섯 살 안진진의 이름. 이름부터 ‘참 진’ 자를 두 개나 써서 진국인 것 같지만 성 ‘안’이 어쩐지 넌 안된다고 평생 부정하며 살아야 하는 이름 그 자체. 그런데도 매번 안진진을 성 붙여 그대로 부르고 매번 ‘안진진, 어떻게 생각해?’ 하는 남자 김장우를 사랑하는 건 우리의 모순이다. 성을 같이 부르는 게 무려 사랑과 존중과 배려를 느끼게 하는 이 모순이란.
2
김장우에게 대한 사랑을 깨달은 순간부터 불편해서 말도 안 섞고 쳐다도 안 보는 안진진의 그 알쏭달쏭한 심정은 말도 안 되지만 그게 진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을 깨달은 순간 그 사람이 불편해지는 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3
우리는 ‘진진 씨’라고 부르는 남자 나영규가 부담스럽다. 데이트 코스부터 프러포즈 계획, 결혼 후 거처까지 모든 게 계획되어있는 남자 나영규가 불편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안진진이 김장우에게 말 못 하는 사정까지 나영규에게는 털어놓는 모순을 보면서, 자신의 상황만으로 버거울 김장우에게 짐을 더하고 싶지 않을 진진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로 한다. 우리도 가끔 낯선 사람에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불쑥 아무렇지 않게 자기 인생사를 얘기하는 때가 있다. 또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우리는 한 번쯤 겪어본 바다.
4
온 생애를 걸고 제대로 살기 위한 방법으로 안진진이 결혼을 선택했다는 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본인의 역량을 키우고 발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안진진이 생애를 걸고 완전히 살아내는 방법으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사는 모순적인 방법밖에는 없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일생일대의 기회인 배우자 선택에서도 감정과는 모순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것에 대해 우리는 무한정 상심하게 된다.
5
비교와 대조는 왠지 자연스러울수록 약자의 상황을 더 처절하게 만든다. 엄마가 쌍둥이라는 설정만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건 우리의 비약일까? 엄마는 그 자체의 상징인데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면서 우아하고 고상하며 소녀 같은 이모를 보는 건 어쩐지 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결국 풍요 속의 빈곤으로 자살을 결심한 이모와 악착같이 살아가는 엄마의 아이러니.
6
매일 술을 먹고 뭐든지 쥐어패던 안진진 아버지는 바깥에서 방황한다. 해가 질 무렵에는 집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는 아버지. 어느 때라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충동이 아니라 순리인데. 집은 감옥이고 어머니는 간수라며, 자신을 옥죄지 말라는 말과 함께 몇 번이고 집을 떠난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어있는 아버지는 안진진의 눈에 어떤지 자유롭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복잡하고 가여운 사람은 맞지만, 그럼에도 책임의 끈을 붙들고 사는 다른 아버지들은 뭐가 되는지 괘씸함에 더 이상 읽을 수 없어서 잠깐 책을 덮고 나의 과거를 생각했다.
7
하루도 빠짐없이 울던 나에게 아빠는 뭐가 문제냐고 했다. 더 이상 뭘 더 해야 하냐고. 캐시를 쏟아붓는데 레벨업을 안 하는 캐릭터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망캐야. 몇 번이나 곧 죽을 거라고 선언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또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울었을 때 그는 드디어 말했다. “아빠도 포기하고 싶어. 아빠는 근데 책임질 사람이 너무 많아. 엄마, 너, 승원이, 혜원이, 할머니까지 다 아빠만을 보고 있는데 내가 힘들다고 해서 아, 나 이제 그만. 그만 하겠습니다. 해서 다 놓을 수 있을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사는 거라. 왜냐면 아빠니까.”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다. 계획대로라면 말짱하게 큰 딸이 평범한 대학생이 되는 것뿐인데 나의 뜬금없는 정신이 말짱하지 못 해 그는 얼마나 상심이 클까.
그런데 내 상태가 위기를 넘겼을 때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아, 그만, 나 그만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지은 담담한 표정과 손사래가 명장면처럼 상기되었다. 연기로나마 포기해보는 그의 모습. 그가 영원히 멀어지는 느낌. 아, 그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중이였다.
이제 그는 우리 사이의 치정어린 5년은 기억도 못하는 것처럼, 아니 나의 15년은 기억 못 하는 것처럼 나를 10살처럼 대한다. 나도 10살 때 못 했던 어리광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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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식은 정답이 아닌 걸 알더라도 채점당하기 위해 찍어야 한다. 주관식은 말도 안 되는 어떤 답이라고 적어내야 한다. 그렇게 모순된 답이라도 어쭙잖게 내놓아야 하는 게 안진진 그리고 우리의 인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