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전북대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는 차를 가지러 목포에 가고 있다. 지금 막 고속버스에 탔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에서, 오랜만에 켠 휴대폰으로 브런치에 글을 남긴다. 아빠의 재발암 진단 이후 10일이 흘렀고 나는 그간 무얼 했을까.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아, 고향 친구들을 만났다. 난 도저히 동창회를 갈 수 없는 심적 상태지만, 오래전에 약속한 만남이라 어길 수가 없어 만났는데 정말 만나기 잘했다.
물론 나는 그들을 만나기 3분 전까지 그리고 만나고 헤어진 직후부터 흥건한 눈동자를 유지했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메마른 안구 상태였다. 슬픔을 숨긴 게 아니라 그때는 슬프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들이 하는 대화가 나는 전혀 관심 없는 아이돌 그룹이나 치과 임플란트에 관한 것일지라도 더 듣고팠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 모두 그 자리에 꺼내지 못한 각자의 괴로움이 있겠지만 그 자리에서 어두운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음식을 먹고 새벽까지 같이 넷플릭스 봤다. 그 편안한 분위기 덕에 그날은 푹 잘 수 있었다.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만큼 사람을 위로하는 건 없나 보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별일 없다는 듯이 옆에서 숨 쉬고 있어 주는 것. 지난 며칠간 고민 끝에 나는 아빠에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러저러한 확률을 재잘거리기보다 그저 옆에 조용하게 있어주는 것을 택했다. 아빠는 눈먼 환자가 아니다. 아빠는 매우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며 무엇이든 그 결과를 침착하게 예측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면을 나는 언제나 존경하고 의지해왔다.
“힘들게 살지 마라 절대.”
“뭐가?”
“아빠처럼 힘들게 살지 말라고. 그냥 책임감도 조금만 갖고 남들 보기에 속 없어 보일지라도 즐겁고 재밌게 살아.”
위 대화를 나눈 날. 아빠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바라보았지만 티비가 아닌 그 너머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지난 10일간 아빠는 아침이건 저녁이건 새벽이건 쉽게 잠들지 못했고 동시에 늘 깨어있지도 않았다. 눈은 감고 있되, 자지 않는 상태다. 전북대병원 입원 날짜가 오기 전까지 집에 머물렀던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는 하지 않았다. 같이 밥 먹고 티비보고 나는 공부를 하거나 흑염소를 보러 갔다 오는 리듬을 반복했다. 아, 어제는 아빠가 산악용 오토바이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흑염소 농장까지 가려면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해서 보통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오토바이가 엔진이 고장 났는지 내가 시동을 걸자마자 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다행히도 나의 수준 높은 민첩성으로 재빠르게 브레이크를 잡아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진 않았다. 아빠가 너무 놀라서 쓰러질 뻔했다. 덕분에 다음부턴 오토바이를 타지 말고 건강한 두 발로 오르내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운전도 처음 알려주었다. 오랜 시간 화물차 운전기사였던 아빠는—딸과는 다르게—위험운전을 하는 법이 없었다. 아빠는 운전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굳이 차선을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쪽으로 가야겠다 싶으면 몸이 자연스레 움직인단 거였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가 운전석에 앉고 그 위에 내가 앉아서—그때만 해도 난 매우 가벼운 몸을 지녔음—내가 핸들을 잡고 아빠가 엑셀과 브레이크를 조절했다. 아빠는 내가 어떤 위험한 상황이 오면 차를 발견했을 때 운전을 해서 탈출하기를 바랐다. 다행히 여태 그러한 무면허 운전 및 차량 절도를 감수할만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만, 탈출하고픈 상황은 지금 와버렸다. 나는 지금 이 현실을 탈출하고 싶다. 아빠를 그 어찌할 수 없는 육신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싶다. 흘러가는 시간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종양의 크기로부터, 그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아빠를 제발 탈출시키고 싶다. 도움된다면 시내 한복판에서 발가벗고 도끼로 나무라도 찍고 싶다.
전주와 광주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1시간 30분 정도 거리다. 목포에 가려면 광주를 거쳐 가는 게 제일 빠르다. 창밖이 흐리다. 광주 버스터미널이 보인다. 아빠가 걱정된다. 글을 쓰고 보니 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부디 나름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 여겨주길.
+추가)
오늘 오후 늦게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북대병원 교수님께서 아빠에게 신약을 시도해보겠다고 말하셨다고한다. 너무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보험처리가 안되는 비싼 신약이지만 뭐든 잡을 수 있는 끈이 생겼다는 것 자체로 아빠와 나는 매우 활기찬 대화를 오랜만에 했다. 제발 이 현대의학의 발전이 이 전라북도 전주에도 이뤄졌기를. 오늘은 자기 전, 대략 4년 9개월만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