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또 끝맺음은 어떻게 할지. 나의 내밀함을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고 어디 부분을 숨겨야 할지. 사실 모르겠다. 지금은 새벽 2시 31분이고 그냥 키보드가 눌리는 대로 적고 있다.
가족에 대하여. 진부하다면 가장 진부할 수 있는 게 가족 이야기지만 별 수 없다. 삶에서 가족을 빼놓고 무언가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기에. 어쩌면 이 사람들은 내가 행해온 모든 궤적의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모든 계획의 중심에 굳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리하고 있을 이들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큰 존재인 사람들이 지금 많이 아프고 그로 인해 나는 괴롭기 때문이다.
엊그제 오랜만에 전주에 올라가 전북대병원에 갔다. 그곳에 가족 중 한 명은 입원 환자로 있고 한 명은 외래 환자로 그날 갔다. 백혈병에 걸린 큰 언니와 폐암에 걸린 아빠다. 언니는 7주 전쯤 진단을 받았고 그 이후 내가 목포로 내려와서 엄마와 조카를 돌보고 있다. 언니는 1차 항암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아빠는 1년 전에 진단을 받아 6차 항암까지 다 마친 상태다. 언니를 생각하고 바라보면 너무 가슴이 미어지지만, 지금 이 글은 아빠에 관한 이야기다.
이날 아빠는 정기검사 차원에서 병원에 외래로 들린 참이었다. 나 또한 큰언니에게 골수이식을 해주기 위한 유전자 검사 차원에서 병원에 갔고, 간 김에 아빠의 정기검사 결과를 함께 확인하려 했다. 아빠는 이번 연도 5월 정기검사까지만 해도 폐가 매우 깨끗해져 몸이 크게 회복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날은 의사를 마주해 앉아있는 진료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의사는 아빠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CT 촬영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저번 것과 비교했을 때 완전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이번에 찍은 사진 속 폐에는 하얀 것이 가득 차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그 하얀 것이 종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의사는 주어를 생략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시 진행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는 차근차근 소세포 폐암의 특징들-그간 숱하게 설명해온 내용들-을 다시 짚어주었다. 빠르게 사라졌다가 몇 주 만에 금방 재발이 가능한 점,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 점, 검증되어 보험처리 가능한 신약이 별도로 나온 게 없는 점, 그리고 매우 악랄한 점. 소세포 암의 특징이다. 재발은 열명 중 일곱 명에게서 나타난다고 의사가 뒤이어 말했다. 알아. 당신이 말해줬잖아 전에도...
인간이 흔히 하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보편성이 곧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란 추측이다. 야속하게도 당사자들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보편적 숫자, 아빠로 치자면 일곱 명 중에는 아빠가 들지 않기를, 나머지 특별한 그 세 명 가운데 아빠가 제발 포함되기를 바란다. 그 보편적 숫자가 심지어 3천만 명이든 3억 명이든, 이 병의 보편성이 아빠가 걸린 병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것 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충격적인 재발 진단을 받고서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아빠가 먼저 나가서 서 있었다.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을 이제 못 볼 수도 있구나. 이 사람과 통화를 하거나 함께 밥을 먹지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아빠와 제주도 여행을 다시 가거나, 여태 그래 온 것처럼 나의 모든 사소하거나 큰 결정을 상의할 수 없겠구나, 아빠의 두껍고 거친 이 손을 잡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정말 이기적인 생각들이지만, 이것이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대한 이별을 고려한 첫 생각이었다.
사실 이날의 내용을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이 아주 많은 부분을 침착하고 차분하게 만들고 있다. 현실에서는 그 의사를 대면한 이후에 나의 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정말 전형적인 표현이지만, 가슴속 어딘가에서 물리적인 고통을 느낀다. 처음엔 아빠를 못 볼 생각에 울었다면 지금은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 미칠 것 같다. 그의 인생에 이 딸은 좋은 것을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
언니들이나 엄마에겐 이 슬픔을 비추지 않는다—참고로 가족들은 이 홈페이지 존재자체를 모른다— 물론 아빠에게도 숨긴다. 해준 것도 없는데 더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내 주변에 누구에게도 쉽사리 터 놓지 못하겠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 같다. 육성으로 말하기엔 슬픔이 먼저 터져나올 것같아서 글로 터놓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 글을 다 쓰고 보니 괜히 쓴 것 같다. 시간은 3시 55분... 2시 30분에 시작했는데.. 솔직히 울면서 써서 더 오래걸렸다. 눈이 너무 부어서 이제 따갑기까지 하다. 이제 정말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