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 우리 남편들하고 같이 만나느라 수다를 제대로 못 떤 거 같애. 여행 떠나기 전에 둘만 따로 만나자."
"좋지, 나는 다음 주 아무 때나 좋아. 점심, 저녁 아님 브런치도 괜찮고."
친구 얀티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이다.
남사친 데이빗이 수줍게 '여자친구'라며 소개했다.
"Hi, Nice to meet you~"
데이빗은 여사친이 유난히 많은 친구다. 큰 오빠 같은 캐릭터인 그는 어떤 얘기를 해도 비밀을 지켜 주는 그래서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도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그런 남자다. 게이도 아닌데...
썸을 타던 여자들도 몇 있었는 데, 정식으로 '여자친구'라고 소개해 준 사람은 얀티가 처음이었다.
"손예진, 나 'Watermelon Soju' 마시고 싶어. 요즘 너무 더워서 그런지 그거 너무 땡겨."
'사랑의 불시착'을 본 후 뒤늦게 K-Drama에 빠진 얀티, K-Drama, K-Pop, K-Goods.... 그리고 값이 싸다면 1일 1병을 하고 싶다는 '소주'... K-폐인이다.
얀티가 '사랑의 불시착'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리나, 나 이제부터 너를 '손예진'이라 부를 거야."
"왜???"
"나는 손예진이 너무 좋아. 너는 나의 유일한 Korean Bestie잖아. 그래서 그런지 손예진을 볼 때마다 니 생각이 나."
"그래? 맘대로 하셔.."
평소에는 나를 '손예진'이라 부르든지 어쩌든지 상관없지만, 한국 식당에서는 쫌 민망하다. 얀티 특유의 콧소릴 섞어 우아하게 '손예진~~ My Real-Life 손예진~'이라 부르면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은 나에게 꽂힌다.
모두들 J-드라마에서 K-드라마로 옮겨 타던 '대장금' 시절엔 혼자 고상한 척 우울하고 침침한 프랑스 드라마나 보고 있더니,
3년 전 뒤늦게 입문한 K-wave에 정신을 못 차린다.
"나 드라마에서 OO 봤는데 우리 그거 먹으러 가자... 자몽 소주 너무 맛있어. 매일 저녁 데이빗하고 한 병씩 마셔. 와인 끊고 소주로 옮겨 탔어."
"너 1일 1병 하다 알코올 중독 되면 어쩌려고?"
"한국 사람들은 앉은자리에서 몇 병씩 마시던데, 그럼 한국 사람들 다 알코올 중독이야?"
나는 한국 식당을 일부러 찾아갈 만큼 한국 음식을 자주 먹거나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소주, 막걸리 포함 세상 모든 술을 끊은 지도 오래됐다. 한국 친구들하고 만날 땐 절대 한국 식당을 갈 일이 없는데 싱가포르 친구들을 만날 땐 늘 한국 식당을 가게 된다. 싱가포르 친구들은 내가 별로 즐기지 않는 파전, 양념통닭, 삼계탕, 부대찌개... 같은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고 소주와 막걸리를 취하게 마시지는 않지만 한국 음식을 먹을 땐 당연히 마셔야 하는 걸로 안다. 한국드라마에서 그렇게 보았기 때문인지...
Watermelon Soju, 한국인 직원은 얼린 수박 반통의 과육을 긁어낸 다음 거기에 소주 한 병과 스프라이트 한 캔을 다 부어 넣고 갈아낸 얼음도 와르르 넣어 준다.
얀티는 국자로 떠서 컵에 부은 다음 얼음과 수박을 씹으면서 소주를 마신다.
"얀티, 너 소주 마시면 다음 날 머리 안 아파?"
"아니. 소주 마시면 머리 아픈 거야?"
"손예진, 나는 다음 생엔 한국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
"엥??"
"한국 사람이면 한국말 잘하니까 영어 자막 없어도 한국 드라마 볼 수 있잖아."
"음. 그건 그렇지... 나도 일부러 영어 자막을 켜 놓고 한국 드라마 보는데 자막 읽으면서 드라마 보면 느낌이 안 오겠다 싶긴 하더라. 세심하고 복잡한 한국어를 영어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지. 거기에 사투리는 번역할 방법이 없잖아... 사투리가 더하는 감칠맛이 꽤 크거든. 극장에서 한국 영화 볼 때 한국 사람들은 웃겨서 넘어갈 지경인데 외국 사람들은 우리가 왜 웃는지 잘 모르더라."
수박 소주를 반쯤 비웠을 때 얀티는
"나 기도할 거야. 다음엔 한국 여자로 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 그런데, 너 기도 잘해야 돼. 만약에 '북한'에서 태어나면 어떡해? 눈을 떴는데 '김일성 동상'이 니 앞에 턱 버티고 있으면??? ㅋㅋㅋ"
"음...... 뭐 그래도 괜찮아. 북한이면 어때? '정혁'씨 같이 생긴 군인이 거기에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