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5일,
남편은 해방이 된다.
해방이다!
자고 일어나면 inbox에 쌓여있던 수백 개의 이메일과
캘린더에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던 알록달록한 미팅들
한 달에 두 번씩 새벽 2시에 깨서 진행해야 했던 콘퍼런스 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한 달 후면 24시간을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오늘 경영진에게 남편의 '퇴직'이 공식발표되는 날이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은 회사를 떠나 퇴직하기로 한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본인이 없어도 회사는 알아서 잘 돌아갈 거라는 걸 알기에 감사하면서도 섭섭한 복잡한 심정으로
오늘 아침, 남편은 허둥지둥 출근을 했다.
작년 12월 말에 퇴직하는 걸로 결정했었지만 한국 지사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5개월 동안 한국에서 지내며 일을 맡아 처리하고 돌아온 후 CEO의 배려로 회사 일을 정리하면서 서서히 삶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도록 3개월의 여유 시간을 '선물'받았다. 그래서 예정보다 8개월 늦어졌다.
퇴직을 결정한 남편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처음 타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기구를 탈 수 있는 최소한의 '키'보다 커져서 설렘을 안고 어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씩씩한 척, 잘난 척을 뿜고는 있지만 기구에서 나오는 요란한 소리에 섞인 사람들의 함성으로 잔뜩 겁에 질린 아이처럼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했다.
'드디어 나도 탈 수 있다!!!! 아~ 신난다.'
'지금이라도 안 탄다고 말하고 줄에서 빠져나올까?'
'저 옆에 애들이 타고 있는 거, 성에 차진 않겠지만 차라리 저걸 타볼까?'
'자존심이 있지, 창피하게. 그냥 눈 딱 감고 타 보자.'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겨우 30대 초반이었던 남편은 그때부터 이미 '퇴직'을 꿈꾸고 있었다.
20대 중반이었던 나로서는 생소했다. 이제 겨우 사회생활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는 어린 나이에 '퇴직'을 '첫 데이트의 대화 소재'로 얘기하고 있는 이 남자는 멋도 없고 꾸밈도 없었다. 아마 나는 그런 '진솔함과 성실함'에 끌렸었던 것 같다.
결혼 후, 우리는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가계의 재정 상태를 체크하며 투자 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퇴직할 수 있을지를 함께 연구했다. 우리는 딩크로 살면서 '소비'보다는 '투자로 얻은 결과'에서 오는 기쁨을 누려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이 코 앞인데, 그동안 준비를 잘해오고 있다고 믿었는데. 생각할 것도 결정할 것도 너무 많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에서 살 것인가?'
결혼 후 한국에서, 미국에서 함께 살았던 적은 있지만 우리는 '내 나라도, 네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줄곧 살아왔다. 그동안 회사에서 발령을 받고 해야 했던 '국제 이사'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오롯이 우리 둘이 결정해서 거처를 정해야 한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아니,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어디로 갈까?'
우리는 퇴직 후에도 미국도 한국도 아닌 나라에서 살거라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한다고 결정하고 현실적인 여러 요소를 신중하게 고려한 결과 최소 둘 중 한 명은 시민권을 가진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3 국이지만
우리가 20년 넘게 영주권을 받아 살고 있는 싱가포르와 유럽이지만 비교적 저렴하게 살 수 있는 포르투갈을 퇴직 후 우리의 거주국으로 고려해 보았다.
소득세를 납부하지 않는 퇴직자에게 싱가포르 정부가 영주권을 무한 연장해 줄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면 비교적 낮은 싱가포르 소득세로 누릴 수 있었던 절세가 더 이상 메리트가 되지 않는데 굳이 물가 비싼 이곳에서 살 이유가 있을까. 물론 안전하고 코즈모폴리턴 한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다면 싱가포르는 살기 좋은 나라다. 그렇지만 출국해서 여행을 하지 않거나 코시국 때처럼 여행을 못하는 상황이면 싱가포르 내에서 여가로 즐길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제한적이다.
포르투갈은 투자 이민을 고려할 만한 많은 장점이 있긴 하지만 밀려 있는 신청자들로 영주권을 받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의료 수준과 전반적 사회 기반 수준이 우리의 기대치만큼 높지 않았다. 여행 가서 한두 달 즐기고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결론짓고 제외했다.
미국 or 한국, 어디로 갈 것인가?
언어,
우리 둘 모두 가능한 언어가 공용어인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어'인데.. 그럼 미국이다.
미국, 그 넓은 나라 중 어디로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