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면서 닮아가는 걸까, 닮아서 부부가 됐을까
급하게 밀린 빨래를 하느라,
세탁기 안에 흰 세탁물이 남았던 걸 못 보고
크리스마스에 썼던 물 빠지는 빨간색 테이블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던가 보다.
남편의 흰 양말 한 짝이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하는 동시에 번쩍 드는 생각 '남편 없을 때 빨리 버려야겠다.'
출근하고 집에 없는 남편이 마치 집 어디선가 숨어서 보고 있는 거 같아서, 몰래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얼른 후다닥 휴지통에 넣었다.
'그냥 다른 쪽도 핑크색으로 만들어서 핑크로 내가 신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럼 빨간 테이블보랑 흰색 한 짝 세탁기에 넣고 같이 돌려볼까?, 아. 그런데 색이 흐리게 나오면 어쩌지?'
'아이고, 너 왜 이리 궁상이냐. 이 양말짝들 봐라. 목 다 늘어지고, 그냥 과감히 버려라.'
아.. 갈등.
결국 핑크색 한 짝은 남편이 못 보게 내 속옷 서랍에 넣어 놨다.
흰색 한 짝은 남편 양말 서랍에 넣어 두고.
마침 여러 켤레 묶여있는 양말을 산 거라 뭐 나중에 혹시 다른 거랑 맞춰 신게 될 수 도 있을 거니까.
일단 넣어 두자.
핑크색 한 짝을 굳이 숨겨 놓은 건,
남편은 분명히
"아직 멀쩡한데 왜 버려? 색이 다르면 어때? 양말이 양말이지."
하면서 이 양말의 발바닥이 다 닳아 없어지게 될 때까지 앞으로 최소 1년은 이걸 신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전에 시댁에서 묵었을 때다.
욕실에 헤어드라이기가 없어서 어머님께 빌려 달라고 했더니, 머리숱이 별로 없으셔서 드라이기는 더 이상 안 쓰신다면서 전에 시누이가 쓰던 게 욕실 안 캐비닛에 있을 거라고 잘 찾아 보라신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어머님께 찾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 아,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어머님께서 내미시는 의문의 가방 안에는 이런 이상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거 전에 캐런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쓰던 거야. 한참 안 썼는데 작동은 될 거야."
남편의 큰 누나 캐런이 어렸을 때 쓰던 거라면.. 아무리 안 돼도 40년은 된 물건이다.
이게 켜지기나 할까? 그런데 어떻게 쓰는 거지?
어머님께서 코드를 꽂고 테스트를 해보신다.
" 잘 되네."
호스를 통해 나오는 건 '바람'이 아닌 '먼지 공기'였다. 나의 길고 숱 많은 머리를 전혀 말려 주지 못할 그런 약한 공기. 뜨뜻미지근한 먼지가 호스를 통해서 나오는데. 어머님은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니 못 쓰겠다고 할 수도 없고. 대략 난감이었다.
싫증이 나거나 기능 좋은 세련된 신제품이 나오면 가전제품이건 자동차이건 바꾸는 요즘 한국 사람들과는 다르게 시부모님들은 물건이 제 기능만 하면 버리거나 새 거로 바꾸시지 않고 몇 십 년이고 그대로 사용하시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시댁의 50년 된 토스트기는 쓸 때마다 신통방통이다. '아, 어떻게 만들었길래 반백년 멀쩡하지?',
혹시 오래된 가전제품으로 불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새 걸로 바꾸시라했더니
"It's still working." 하시며 잘 작동되는데 왜 바꾸냐 하신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남편은 셔츠의 깃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도, 운동화에 구멍이 나도 절대 버리지 않고 물건이 불쌍해서 못 봐줄 때까지 입고, 신고, 쓴다.
남편은 '아직 멀쩡해. 버리지 마.' 라 하지만,
나는 '안 멀쩡해, 제발 버리자.' 졸라댄다.
가끔은 '버리지 마 vs 버리자'로 다투게 돼서 남편 몰래 남편의 물건을 버리기도 한다.
서울에 갔다가 고속터미널 지하에서 집 베란다에서 신는 것과 똑같은 슬리퍼를 보고 반가워서 한 켤레 샀다.
10년 전, 미얀마에 살 때 친하게 지내던 분이 한국에 다녀오시면서 사다 주신 슬리퍼다.
그런데 사이즈도 같고 상품번호도 같은 건데 새로 산 슬리퍼는 너무 작다.
자매들과 단톡을 하다, "왜 같은 물건인데 사이즈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거지? 하며 사진을 보냈다.
동생은,
'부창부수 라더니, ㅉㅉㅉ'
'하긴 신던 슬리퍼를 보니 내가 봐도 지저분하긴 하다.
10년을 신었으니...
그런데 멀쩡해. 지금도 잘 신고 있어. 새거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계속 신고 있음. '
동생의 답변,
'형부도 그런 거야.
살 필요성도 못 느끼고, 멀쩡해서 남보기에 오래되고 다 낡은 거 못 버리게 하고 계속 쓰는 거야.'
과연 우리는
같이 살아서 닮게 됐을까? 닮아서 부부가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