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이라면 '쌀'이 없어 밥을 해 먹지 못해 대신 배를 채워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으로 여기던 시대가 있었는데, 요즘은 무조건 '면, 빵, 떡'을 끊어야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며 죄 없는 '면'을 고탄수화물의 대명사처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 빵, 수제비를 잡수시면 '가루음식을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하다.'시며 '활명수'를 들이켜시던 아버지 덕분에, 하루 세끼 쌀로 만든 '밥'만 먹고 자란 내가 '면'을 '요리'로 여기고 마음껏 즐기기 시작한 건 90년대 중반 싱가포르에서 살기 시작한 때부터다.
이태리의 다양한 파스타만큼 국수 종류도 많고 무엇을 넣어 만드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신이 가능한 동남아시아의 국수요리. 고추오일과 굴소스, 파만 넣어 휘리릭 비벼주는 저렴하고 간단한 국수에서 살이 꽉 차 단맛이 나는 King Prawn을 센 불에 볶아 불맛을 낸 후 쉬림프페이스트와 칠리를 함께 넣어 고급지게 만들어 주는 국수까지. 식탁 위에 이것저것 그릇을 늘어놓고 먹어야 하는 번잡스러운 음식이 아니라 각종 재료가 모두 한 그릇에 담기는 '한 그릇 음식'이다 보니 요리할 때도 먹을 때도 치울 때도 쉬운 게 또한 국수 요리다.
싱가포르에서 살기 전에는 쌀로 만든 국수라면 베트남 쌀국수에 들어가는 얇은 국수 한두 번 먹어본 게 다였고 쌀국수가 실처럼 얇은 국수에서 손가락 두 개 넓이의 넓적한 국수까지 다양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은 모양의 넓적한 쌀국수인 퀘티아우(kway teow)와 호펀 (hor fun)의 식감은 특별하다.
밀가루나 감자로 만든 국수와 다르게 혀에 닿는 촉감이 부드러우면서도 푹 퍼지지 않고 쫄깃해서 씹지 않고 숟가락으로 긴 국수를 잘라 밥처럼 떠먹거나 길고 넙죽한 묵직한 무게의 국수를 젓가락으로 크게 들어 올려 입에 넣고 씹으면서 쫄깃한 느낌을 즐기며 먹어도 맛있다.
차퀘티아우(Char Kway Teow)
wok hei라고 하는 불맛을 내서 볶은 퀘티아우 국수요리
차퀘티아우(Char Kway Teow)를 맛있게 하는 스톨(stall)에 가면 돼지기름을 wok에 발라 뜨겁게 달궈 불맛을 내서 만든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 인구가 총인구의 15퍼센트 되다 보니 돼지기름 대신 '식물성 오일'을 써서 요리하는 곳에는 'No pork, No Lard'라는 표시가 따로 되어 있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게 낫겠지만 차퀘티아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입안에서 도는 기름진 맛이 덜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돼지기름으로 만든 것을 선호한다.
퀘티아우 면에 약간의 에그누들을 섞어 꼬막, 새우, 어묵 조각, 중국식 소시지, 숙주를 넣고 볶다가 계란을 뜨거운 wok에 넣고 튀기듯 익혀서 나머지 재료와 섞어 준다.
음식을 낼 때에는 느끼함을 덜어줄 수 있게 단 맛이 강한 깔라만시와 풋고추로 만든 피클을 함께 올린다.
비만으로 체중감량을 해야 하거나 고혈압이 있는 환자들에게 싱가포르 의사들이 항상 당부하는 말이다.
"차퀘티아우 먹으면 안 돼요."
그러면 환자들은 우울해진다.
"No Char Kway Teow, No Life.(차퀘티아우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살아.)"
해산물 or 소고기 호펀 (Seafood Hor Fun, Beef Hor Fun)
한참 차퀘티아우 맛에 빠져 매일 점심으로 먹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 몸무게가 늘거나 성인병이 생기진 않았다.)
스톨의 주인분이 내가 싱가포리안이 아닌 걸 알고, 왜 매일 같은 것만 먹냐고 호펀도 맛있으니까 먹어보라 권했다. 내가 처음 본 호펀의 모습은 넓적한 쌀국수가 녹말 계란탕 안에 푹 잠겨 있는 우울한 국수였다. 날씨도 더운데 한 접시 먹고 나면 훈훈해진 뱃속이 전혀 식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은 추울 때 한국에서 먹었던 '울면'을 생각하게 했다. "다음에 먹어볼게요. 오늘은 차퀘티아우 먹을게요."
맵거나 달거나 짜지 않은 순한 맛의 '해산물 호펀'이 생각나는 때는 속이 쓰리고 거북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음식을 먹기 애매할 때이다. 살다 보면 입맛은 없지만 살기 위해 뭐든 먹어줘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죽을 먹기엔 먹으나 마나 할 것 같고 제대로 된 음식 한 접시를 먹고 에너지를 충전해야 할 때,
불 맛을 내서 볶은 국수에 걸쭉한 녹말가루에 잘 풀어진 계란이 어우러져 쫄깃하고 흐물흐물한 특이한 식감이 포만감은 주지만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에 반해 후추를 잔뜩 넣은 Beef Hor Fun 은 간장에 재운 소고기를 녹말물을 입혀 중국식으로 볶아낸 물컹한 식감의 소고기 맛과 강한 후추 맛에 호불호가 나뉘지만 고추의 매운맛보다는 후추 특유의 훅하는 맛을 즐기고 싶을 때 먹는다.
해산물과 MSG 알레르기가 있는 데다 콜레스테롤까지 위험 수치인 남편을 위해 돼지기름, 해산물, MSG가 들어 있는 중국 간장과 굴소스를 뺀 건강하지만 애매한 맛의 차퀘티아오와 비프호펀을 집에서 직접 만들곤 한다.
'몸에 좋은 게 맛도 있음 반칙이지.' 스스로 위로하며,
내가 한 모든 음식은 맛있다고 잘 먹어주는 남편에게 감사하며.
맛있는 감칠맛을 내는 모든 재료가 빠진 애매한 맛의 국수지만 슈퍼마켓 냉장 칸에 있는 생면을 사서 볶으면 조리 후에도 쫄깃한 맛을 유지해 줘서 국수 씹는 맛으로 냠냠 맛있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