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월세er의 징크스는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이사 날짜를 잡으면 꼭 집안의 뭔가가 고장 나서 성가시게 한다.
지금 월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에어컨 두 대가 고장 났다.
고장이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집주인에게 렌트계약서에 써진 대로 3개월에 한 번씩 에어컨 관리 업체에게 클리닝을 받아왔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이 집에 설치된 에어컨 여섯 대 모두 너무 오래돼서 저절로 멈출 날이 곧 온다.'는 말을 에어컨 관리 업체로부터 처음 우리가 이 집에 이사 들어 온 7년 전부터 들어왔던 터라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버텨준 게 기적이라 생각했지만 집주인 측 입장은 달랐다. '관리 소홀'로 인한 고장이 아닌 것을 증명해 달라는 집주인 에이전트의 말에 오기가 나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수십장 분량의 에어컨 서비스 인보이스를 PDF 파일로 다 보내버렸다.
워낙 오래되어 켤 때마다 모터소리가 요란하긴 했지만 세입자로서 집의 에어컨을 교체할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주인 입장에서는 월세 준 집에 최대한 돈을 들이고 싶지 않을 텐데 '노후되었다, 모터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론 새것으로 교체해 줄리 없다는 걸 경험상 잘 알기에 그럭저럭 그런대로 살았다. 몇 개월만 더 버텨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난히 더운 요즘 같은 때 에어컨이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며 죽어버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990년에 준공된 오래된 건물이지만 나름 관리가 잘 되어 꽤 만족하며 살았다. 80대 중반의 노부부인 집주인은 15년 전에 이것저것 손을 봐서 새것과 다름없다 말하지만, '세' 줄 요량으로 저렴한 자재로 고쳐 놓은 집은 집으로 제대로 기능은 하고 있으나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노인네 취향의 집이다.
7년 전에 렌트할 집을 알아볼 때, 같은 가격이면 다소 비좁지만 세련된 새 아파트를 원했던 나였지만 호더 (hoarder)에 가까운 남편이 이사 때마다 버리지 않고 끌고 다니는 아메리칸 사이즈의 가구와 물건 덕분에 세련된 아파트를 포기하고 대신 오래되어 허름하지만 평수 넓은 집을 선택해야 했다. 우리가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면 그 모양새는 아마 거대한 코끼리가 반짝이는 크리스털 박스 안에 구겨들어가 앉아 있는 듯한 어울리지도 편하지도 않은 모습이었을 거다.
그나마 입주하기 전에 깨끗하게 페인트 칠도 했지만 높은 습도 때문인지 콘크리트 벽과 페인트가 들떠서 떨어지기 시작하고, 집 안에 이것 저것 손보고 싶은 데가 눈에 띈다.
'아, 내 집이라면... 이건 이렇게 고치고, 저건 저렇게 고치고. 이 벽은 이렇게 칠하고 붙박이 옷장은 이런 걸로 교체하고...'
성형중독에 걸린 사람이 남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코는 이렇게, 눈은 이렇게, 턱은 이렇게 고치면 훨씬 더 예쁠 텐데 하며 혼자 상상해 보듯 나 또한 월세로 살고 있는 타인 소유인 '남의 집'을 돌아보며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고쳤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결혼 전, 처음으로 아버지께 남편을 소개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딸이 금발의 파란 눈 '코쟁이'를 데려 온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보태서 서른여섯 나이의 남자가 집 한 칸도 없어 딸이 월세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거라는 거에 더 기가 막히시는 듯했다.
"뭐 월세?"
"쟤 연봉이 얼마나 되냐?"
"저 나이에 집 한 칸 없어?"
"전세도 아니고 월세?"
전세라는 특이한 '세' 방식은 한국 밖에 없다는 것과 주재원들은 회사에서 주택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자가'에서 살면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드렸지만 아버지는 그런 '없는 놈'과 결혼한다는 딸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혹시라도 이 놈이 '사기꾼'이 아닐까, 한국 사람이라면 전과 조회도 해보고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뒷조사를 해볼 텐데 외국인이라 그것도 못하게 생겼으니 사람을 앞에 두고 화를 낼 수도 없고 속상한 걸 티도 못 내겠고 눈을 마주치기 싫으셔서 먹물에 적신 붓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가늘고 부드러운 '난'도 아닌 '대나무'도 아닌 뭔가를 그리는 척 하고 계셨다.
어쩌면 말이 통하지 않는 '사위', 그 사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먼 곳에서 살 것 같은 '딸'. 이 모든 게 섭섭하셨던 차에 '월세'라는 말까지 듣고 나니 가슴이 답답하셨던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집 한 칸 없는 놈한테 가서 어떻게 살려고?"
"성실하고 돈도 웬만큼 벌어요. 집이야 나중에 정착할 곳에 가서 그때 사면 돼요."
그 땐 몰랐다. '나중에'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우리 정말 오래 살았다. '월세'"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 20년 넘게 그 긴 세월을 월세로 살았다는 게. 손봐야 할 데가 있으면 집주인한테 연락해서 집주인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내 맘대로 인테리어도 못하고. 하다 못해 못 하나 내 맘대로 제대로 못 박고 살았잖아."
"이제 내 집에서 살 거라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
"나도"
광복절인 오늘, 남편이 '퇴직했다'
남편은 아직 '끝'이 아니라며 '퇴직'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한다.
작년에 퇴사한 나로서는 이미 '퇴직' 모드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왜 나는 남편이 '퇴직'하는 게 설레고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 나이 이제 겨우 53세인데 회사 일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천연기념물 같은 답답이 남편, '삼식이'를 데리고 24시간 붙어 있을 생각을 하면 조금은 염려도 되지만 무엇보다 내가 들뜨고 신나는 건 이젠 더 이상 회사에서 '가라는 데'로 가서 '월세'를 살 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거다.
만년 월세er에게 내 집이란, '자유'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내가 직접 고른 색으로 벽에 페인트 칠도 하고, 내 취향에 맞게 계절별로 커튼도 만들어 달고. 분위기에 따라 조명도 바꾸고. 마당에 예쁜 화초도 심어서 가꾸고...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이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 동안 누리지 못한 것까지 실컷 다 누리고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