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시부모님을 만났을 때 두 분은 60대 중반으로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즐기는 부부의 모습이셨다. 아버님은 IBM에서, 어머님은 교육직 공무원으로 30년 이상 일하시다 퇴직하셔서 큰 부자는 아니어도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아도 될 만한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이 있으셨지만 특별한 취미가 있거나 혹은 관광을 목적으로 여행 다니는 것을 즐기시는 편이 아니셔서 여유로운 '시간 부자'로 늘 같은 일상을 보내셨다.
오전 8시쯤, 다소 느긋하게 일어나셔서 앞마당 우편함에 꽂힌 신문을 가져다 펼치시며 아침으로 시리얼을 잡수셨다. 신문을 읽으시며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 사고, 로컬 뉴스, 날씨 이야기를 하시며 오전 시간을 보내시다 정원에 나가 화초를 둘러보시고 혼잡한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11시쯤 외출 준비를 하시고 점심 식사 하러 나가셨다. 점심 식사 장소는 아침 신문에 끼워져 온 광고지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주로 대형 슈퍼마켓 안에 있는 델리코너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수프, 혹은 샐러드를 세트로 잡수셨다. 슈퍼마켓에서 점심을 잡수시는 날은 광고지를 꼭 들고 가셔서 점심 식사 후엔 '그날' 세일하는 물건을 구입하셨다. 저녁 메뉴도 세일하는 식료품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예를 들어 옥수수 10개에 $3.99, 간 소고기 2파운드에 $5.99 로 특가에 파는 날 저녁 메뉴는 옥수수와 미트로프가 되었다.
특별히 사야 할 물건은 없지만 슈퍼마켓 이곳저곳 다니시며 다른 곳과 가격 비교도 하시고 주말 신문에 끼워져 오는 '쿠폰'을 모아둔 쿠폰 뭉치를 꺼내 쓸 수 있는 쿠폰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곤 했다. 두 분은 진심 슈퍼마켓에서 물건 구경하는 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오후에 집에 돌아와서 책이나 잡지를 보시면서 시간을 보내시다 5시에 TV를 켜서 로컬 뉴스 채널을 틀어 오늘 있었던 사건사고와 별다르게 바뀐 것도 없는 날씨를 반복해서 업데이트하는 일기 예보를 보시면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셨다.
TV를 끄고 저녁 6시에 식탁에 앉아 기도를 드린 후 저녁을 잡수시고
다시 TV를 켜서 뉴스를 보시면서 설거지를 하셨다.
직접 만드셨거나 옆집에서 주었거나 혹은 슈퍼마켓에서 사 오신 '초콜릿칩 쿠키'를 하나씩 잡수시고 거실에 앉아 매일 저녁 7시부터 한 시간동안 게임쇼를 보셨다.
참가자들과 방청객들이 'Wheel Of Fortune'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1982년이래 같은 남녀 쇼호스트가 진행하고 있는 장수 퀴즈쇼에 모든 감각을 집중해서 경쟁하듯 퍼즐을 맞추셨다. 혹시라도 참가자가 Wheel을 돌리다 'Bankrupt'에 멈춰 모아둔 상금을 다 잃게 되면 진심 안타까워하시며 마치 따놓은 판돈을 모두 잃은 포커플레이어 마냥 아까워하셨다.
30분 동안 Wheel of Fortune을 보시고 바로 이어지는 또 다른 장수 퀴즈쇼 'Jeopardy'에 또다시 이목을 집중하셨다. Wheel of Fortune에 비해 심화된 퀴즈를 맞혀야 하는 쇼여서 이번에는 '오락'보다는 '배우는 학생'의 자세로 호스트가 내는 문제를 찬찬히 듣고 답을 생각하셨다. 여러 방면으로 박학다식한 아버님께서는 분야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답을 맞히시는 데 반해 어머님은 당신이 잘 아시는 분야에서만 띄엄띄엄 답을 맞히셨는데 아버님께 답 안다고 바로 답하지 말고 방해되지 않게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핀잔을 주시곤 했다.
30분씩 총 1시간의 두 퀴즈쇼가 끝나면 아버님은 마티니 한잔을 어머님은 핫초콜릿 한잔을 만드셔서 다시 TV 앞에 앉아 스포츠를 보시거나 영화를 보시거나 두 시간 정도 TV를 시청하시다 '책 좀 읽다 주무신다'며 2층에 있는 침실로 가셨다.
거동이 불편해 지시기 전까지 일주일에 두세 번 하셨던 자원봉사 외엔 소위 '활동적'인 일은 거의 하지 않으셨던 두 분은 요일에 따라 오전 오후 스케줄은 변동이 있을 수 있어도 저녁 퀴즈쇼 시간만큼은 반드시 지키셨다.
남편은 장수프로그램인 뻔한 퀴즈쇼 시청이 하루 일과인 자신의 부모님을 부끄러워했지만 Wheel of Fortune, Jeopardy 두 개의 퀴즈쇼를 좋아하는 나는 시부모님과 함께 퍼즐을 맞추면서 보내는 저녁 시간을 즐겼다.
남편이 두려워하는 퇴직 후 삶의 모습은 부모님들의 일상처럼 생산성 없는 삶을 살다 노년기를 보내는 것이다. 별다른 취미도 친한 그룹의 친구들도 없으셨던 두 분은 자식들과 손주들의 삶의 범위 내에서 사시면서 시시한 퀴즈쇼나 보며 삶을 허비하며 사셨다 생각해 온 듯하다.
퇴직 1일을 맞은 남편은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블룸버그 채널에서 경제 뉴스를 본 후 옷을 차려입고 8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어디 가?"
"중고 가구점 좀 다녀 보려고. 이삿짐 싸기 전에 가구 처분하라며?"
"오. 드디어... 처분!! 좋아 좋아. 그런데 가구점 일찍 안 여는데. 벌써 나가려고?"
"응."
아침에 어디론가 가지 않으니 이상한 가 보다 하는생각이 들어 어디로 가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남편은 오후에 집에 와서 들렀던 중고 가구점에서 들었던 얘기를 전해 주었다.
"팔려면 헐 값에 넘겨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아까워서 팔기가 좀 그렇다."
웬일로 이번에는 부지런을 떨며 처분하겠다 그러나 했는데 결국은 원점이다.
"오늘 점심도 안 먹었는데 저녁 일찍 먹자."
6시 전에 저녁을 먹었다.
퇴근해서 8시나 돼야 저녁을 먹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점심도 거르고 해서 일찍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니 6시 조금 지났다.
맑은 하늘에 비가 오는 듯하더니 가늘고 긴 둥근 무지개가 하늘에 떴다.
"어머 무지개. 웬일이지? 너무 좋다.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거 같아.ㅎㅎㅎ"
무지개가 얼마 동안 떠 있나 한참 지켜 보다가 시계를 보니 곧 7시다.
"우리 그거 하자. 퇴직하면 하자고 약속했던 거."
나는 TV를 켜서 평소에 잘 보지 않는 싱가포르 채널에 맞췄다.
"Wheel Of Fortune!!!!!"
"뭐야, 싱가포르에서도 미동부와 같은 시간에 방송해?"
시댁에서 어머님 아버님을 보며 우리끼리 하곤 했던 농담이다.
"우리도 퇴직하면 저녁 일찍 먹고, 7시에 Wheel of Fortune 보자."
"저 호스트도 내년까지만 쇼진행하고 은퇴한대. 모습은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올해 76세라니. 호스트가 바뀌어도 쇼가 여전히 재미있을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