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 주소

by 리나

상원의원이 도움을 주었던 건지, 때가 되어서 승인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주에 I-130 (배우자 초청이민 청원서)를 접수한 지 11개월 만에 드디어, 청원서가 승인되었으며 다음 단계 (대사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승인된 서류가 NVC (National Visa Center)로 전달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에 설명된 대로 NVC에 제출해야 할 DS-260 (이민 비자 신청서)을 작성하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필요한 서류는 정부 24 웹사이트를 통해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기본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는 한글로 출력해서 영어로 번역하면 되고 범죄. 수사 경력 회보서는 영어로도 출력이 가능해서 번역할 필요 없이 그대로 제출하면 되었다.


DS-260에는 정부 기관이 요청할만한 뻔한 정보 (출생지, 학력, 경력, 구사 가능 외국어) 외에

16세 이후 1년 이상 체류했던 모든 국가의 범죄. 수사 경력 회보서

최근 5년 동안 사용했던 나의 모든 이메일 주소와 전화 연락처

최근 5년 간 사용하고 있는 모든 SNS 계정과 username

최근 5년, 방문했던 모든 국가 이름

같은 개인적인 정보를 기재해야 하는 칸이 있었다.

'뭐 이 정도쯤이야. 공개하기 불쾌하긴 하지만 필요하다니까 알려 줄 수 밖에.'



최대 난관

16세 이후 거주했던 국내외 모든 주소(우편번호 포함)와 기간(MM/DD/YY-MM/DD/YY)을 기재하라는 칸.

이거 엄청나게 거슬린다.


'설마 이걸 다 기재하라고??'

A4 용지 한 장을 채우고 넘칠 텐데...


내 나이가 지금 20세도 아니고, 30세도 아니고, 40세도 아니고,.... 50이 넘었는데. 그동안 살았던 집 주소와 거주 시기,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설마 설마 아닐 거야.


미국 로펌에서 이민 비자 관련 일을 하고 있는 동생에게 톡을 보냈다.

'이거 다 기재해야 하는 거 맞아?'

'응'

'A4 용지로 한 장 분량 훨씬 더 될 텐데...'

'... 주소지랑 살았던 기간 미리 찾아서 정리해 놓은 후에 DS-260에 옮겨 적어. 1분만 머뭇거려도 사이트가 자동 다운돼서 저장 안 한 내용은 다 날아가. 그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돼. 우리 회사 직원들도 연세 많은 의뢰인들 이민 비자 수속 대행할 때 힘들어 하는 것 하나가 이 주소 적는 칸이야.'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시작된 나의 '이사(moving)'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죽하면 동생이 나에게 'Moving Lee'라는 닉네임까지 지어줬겠나.


내가 살아왔던 그 많은 주소지를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오던 길을 되짚어 뒤로 걷 듯

지난 나의 삶을 오늘을 시작으로 후진하듯 더듬거리며 생각해 보았다.

파일 캐비닛 안에 모아 두었던 먼지 쌓인 '월세 계약서'를 찾아서 퍼즐을 맞추듯 때와 주소를 맞춰 가기 시작했다.


대충 어디에서 언제쯤 살았던 건 기억하는데 오래전에 살았던 집의 정확한 주소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뭘 찾아내려고 하는 걸까... 30년 전에 '리나'가 살았던 집 주소를 알면 '리나'가 나쁜 X인지, 위험한 X인지 파악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때의 '리나'는 지금의 '리나'와 동일인인데... 현재 '리나'를 증명할 만한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SNS 계정까지 알려줬으면 됐지. '리나'가 오래전에 먹고 자고 살았던 집 주소를 다 알아서 뭐에 쓰려고 하는 거지?'



오랜만에 싱글일 때 같이 살던 룸메이트, 정희에게 연락을 했다.

'정희야, 넌 기억하고 있을까 해서... 혹시 우리가 살았던 OO아파트 하고 OOO 아파트 주소 기억해?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 데 집 계약서도 없고 그 집 주소로 된 우편물도 보관하고 있는 게 없어서 정확한 주소를 모르겠네. 갖고 있는 기록이 전혀 없어.'

'음. 저녁에 집에 가서 찾아 볼게. 어딘가에 있을 거야.'

'헉 정말? 대박!!'


저녁에 정희에게 톡을 받고 기가 막혀 웃음이 터졌다.

은근 엉뚱하게 꼼꼼한 X. 언제나 그랬듯 큰 도움이 되었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번역하다 보니, 26년 전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록은 엄마의 이름과, '리나'의 엄마라는 게 다였다. 생년월일도 주민등록번호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딸이며 아내이며 엄마이며,

한 나라의 국민이며 한 도시의 시민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와 관련된 상세한 정보는 더 이상 필요 없어서일까?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세 정보는 '사망'이라는 표기와 함께 여전히 그대로 있는 데.


번역을 끝내고 뒤죽박죽 섞여 있는 서류들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나의 지나온 삶의 여정을 생각하며 스쳐온 주소지를 머리를 쥐어짜며 맞추고 있는 지금이 부질없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