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병실에서 두 달을 지내고 왔더니 크지 않은 집인데 왕족이 사는 큰 궁궐같이 느껴진다.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는 감사함과 성취감 그리고 행복도 잠시,신발과 양말을 벗고 거실의 대리석 바닥을 딛는데 발에 달라 붙는 쾌쾌한 먼지가 신경쓰인다. 절뚝절뚝 목발에 기대어 집안을 둘러보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쓸고 닦고 치우고 싶은 먼지 뿐이다. 내가 집안 구석구석 살펴보며 손가락으로 먼지를 훑고 다니는 걸 본 남편은 우리가 없는 동안 '집이 혼자 잘 있어줬다'며 선수를 친다.
"짐부터 풀고, 저녁 일찍 먹고 쉬자."
내가 혹시라도 자기에게 청소부터 하라고 시킬까 싶었는지, 일찍 쉬자는 내 한마디에 남편은 안도하는 눈치다. 여행 가방을 열고 내 물건을 꺼내서 방으로 옮기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는데 현타(현실 자각 타임)와 멘붕(멘탈 붕괴)이 밀려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다.
"왜? 왜? 뭐 문제 있어? 내가 하는 거 맘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야?... 피곤해? 아파? 왜 우는데?"
"짐을 그렇게 막 아무 데나 던져 놓으면 어떡해? 제자리에 잘 넣어야지. 나 정리정돈 안 되어 있는 어수선한 집 싫어. 못 참겠어."
지난 두 달동안 아파도 힘들어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 마자 화나고 억울한 것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남편도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내가 하는 게 성에 안차는 거 아는 데... 지금은 좋든 싫든 내가 하는 대로 넌 그냥 보고만 있어. 그게 최상이야. 못 보겠으면 눈을 감아 버리든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결국, 우리는 집에 도착해서 여행 가방을 풀기도 전에 한 명은 통곡하고, 한 명은 소리 지르고.
그렇게 그동안 쌓인 것을 각자의 방식대로 표출했다.
'리나! 집에 왔어? 내일 데이빗이랑 저녁 가지고 너희 집으로 갈게. 너무 보고 싶었어.'
늦은 저녁, 친구 얀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응. 그래. 나두. 보고 싶었어.'
집도 마음도 엉망인데 친구들이 온댄다. 아... 이런.
달갑지는 않지만 나를 위해 저녁을 해서 가지고 온다는 친구에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얀티, 그런데 집을 오래 비워둬서 엉망이야. 이해해 줘.'
'알아. 폴이 요리 못하니까 한 끼라도 해결해 주고 싶었어. 그리고 너두 너무 보고 싶고. 눈물 날 만큼 보고 싶었어.'
'응. 고마워.'
음식을 가져다주겠다는 친구에 대한 감사함 보다 지저분한 집에 누군가 찾아 온다는 불편한 마음이 컸지만 얀티에게 고맙다는 메시지에 xoxo(포옹과 키스)를 함께 보냈다.
"내일 저녁에 얀티하고 데이빗이 온대. 음식 가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편,
"그래? 그럼 우린 뭐 준비해야 돼?"
"테이블 세팅 정도...???"
"청소도 해야 되지?"
"청소는 내가 업체에 예약해 뒀으니까. 내 맘엔 안 들겠지만 지금보단 깨끗해지지 않겠어?"
차마 친구들이 온다는 데 화를 내지는 못하고 생각만 해도 피곤한지 남편은 한숨을 푹 쉰다.
다음 날, 청소 업체에서 나온 도우미.
20대 초반으로 호텔에서 청소 경력이 있다는 자기소개서가 믿기지 않는 중학생 나이로 보이는 미얀마 자매. 어려 보이는 건 그렇다 치겠지만 잔뜩 주눅 든 모습의 자매는 청소 도구조차 사용할 줄 몰랐다.
'이런, 청소 업체에 올려져 있는 자매에 대한 정보가 다 구라였나.'
할 수 없이 자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나하나 가르치며 나는 입으로 자매의 손을 빌려 반나절 동안 청소를 했다.
두 달 만에 화장도 하고 옷 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데 남편이 우왕 좌왕 얼굴이 벌개서 바쁘게 움직인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응. 접시 어떤 거 꺼내? 포크하고 스푼, 나이프 세트로 놓아야 돼? 와인 잔은 뭘로, 물 컵은..."
"아무거나 놔."
"그랬다가 혼내려고? 말만 해. 세팅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집안일에 익숙치도 관심도 없는 남편은 어쩌다 내가 접시를 갖다 달라고 하면 평소에 쓰지도 않는 쾌쾌 묵어 캐비닛 뒤에 박혀 있는 걸 꺼내오곤 한다.
"우리 평소에 쓰는 거. 메인 접시 저 거, 디저트는 저 거, 와인 잔은... 그리고 테이블 세팅하기 전에 접시랑 컵 깨끗이 씻어서 티타월로 닦고... 냅킨은..."
간단한 테이블 세팅조차 힘겨워하는 남편을 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하~ 뭐지 이 변태같은 쾌감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손님치레를 완벽하게 해 왔는지. 남편아~ 이제야 알겠어?'
남편에게 집안일이란 Comfort Zone을 벗어난 힘겨운 일인 걸 아는 나는 이 상황을 야릇하게 즐기는 중이었고 그런 나를 눈치챈 남편은 '접시와 유리 잔아 깨져서 저 여자 가슴에 비수처럼 확 꽂혀라' 티를 내고 싶어 일부러 덜그럭 덜그럭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세팅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서로 업데이트하며 저녁을 먹는데 불과 두 달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불편해 보이는 데이빗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파킨슨병을 앓은 지 10년 정도 되었는데 올해 들어 부쩍 증상이 심해지는 게 보인다. Deep Brain Stimulation (뇌심부 자극술)을 받기로 예약해 놓고 대기하는 중인데 이 시술이 데이빗에게 잘 맞아 좀 더 편안한 일상을 지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파킨슨병과 함께 살아 가기에 데이빗은 아직 젊고, 늦게 가정을 이룬 탓에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와인을 몇 잔 마신 데다 편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나와 오랫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서 기분이 좋았던 건지, 명랑 아줌마 얀티는 남편 데이빗을 보며 "그 얘기해도 돼?" 하며 남편에게 허락인지 동의인지를 구한다.
단지 '그 얘기'라고 했을 뿐인데 데이빗은 단번에 알아듣는 눈치다.
"맘대로 해."
부부란, 말을 안해도 말귀를 알아듣는 무시무시한 사이인가 보다.
"며칠 전에. 운전하다가 옆에 앉은 데이빗하고 뭔가 한참 얘기를 하고 있던 중이야.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얀티답지 않게 뜸을 한참 들인다.
남편과 나는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도 내려놓은 채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키고 온 신경을 얀티에게 집중한 채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모르겠어. 내가 뭐에 그렇게 흥분했는지."
'아이구 답답해. 뭔 얘기를 하려고 이래... 제발 나쁜 소식이 아니었으면.'
"애들이 뒤에 타고 있다는 걸 깜빡했나 봐."
뭐야. 애들이 왜? 뭐야 뭐야
"글쎄, 내가 데이빗한테... I need SEX! 하면서 소리를 질렀지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얀티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아. 이런. 이걸 어째.
얀티와 나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여친 사이에 하는 수위 높은 수다로 넘겨도 될 텐데. 남편과 데이빗이 있으니 그것도 안 되고. 휴. 어쩐다. 무슨 말을 하나...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정하고 꺼낸 화제를 무시하고 다른 화제로 돌릴 수도 없고.'
데이빗과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할 거 같아 몇 초간의 침묵을 내가 깨기로 했다.
"왓?? 와 아 아 앗? (What, W-hhhhh-a--t).애들이 들었어?"
"응"
"Shxx! 어떻게 수습했어?"
얀티 대신 데이빗이 대답한다.
"자기가 지르고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얀티 팔을 꼬집은 다음에 재빨리 뒤를 돌아서 애들을 봤지."
어쩐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만약 우리 엄마가 운전을 하면서 아빠에게 저런 말을 했다면? 내가 뒷 좌석에 앉아 있는 아이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참. 이 두 놈은 이런 상황에도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더라."
열 살과 열두 살 18개월 차이 나는 두 아들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극과 극이라 이 둘을 반반 잘 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완벽할까 얀티는 말하곤 했었다.
"큰 놈은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있고. 작은 놈은 나를 째려보면서 따지러 들고 있고."
"따져? 뭘 따져."
작은 아이는 지나치게 발랄한 성격에 길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 없이 아무 대화를 시작하는 아이다.
"엄마. 아빠. 이미 오래전에 '그거' 졸업하셨던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다시 시작하려고 하세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씩씩거리고 화를 내는 둘째 아들에게
"졸업? 엄마 아빠가 하는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인데. 왜 졸업했다고 생각해?"
"졸업했으니까 제 동생이 없는 거잖아요. 저는 동생 싫어요. 나는 형도 귀찮은 데."
여전히 큰 아이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지 귀를 막은 채 머리를 바닥으로 향하고 있고 작은 아이는 뭔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억울해하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아빠 데이빗은 어른들이 만든 자극적인 영상물로 '성(聖)스러운 성(性)' 개념이 왜곡되기 전에 두 아들에게 성교육을 하려고 유난히 수줍어하는 큰 아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했다.
에휴. 다행히 데이비드가 황당했던 '대화 주제'를 잘 마무리해 줬다.
친구들은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갔다.
수다장이 친구들 덕분인지 갑자기 '지지고 볶으며 산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다들 그렇게 사는 가 보다.
자기들 방식대로 지지고 볶으며~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건가 보다.
그릇을 새로 만드는 건지 설거지를 하는 건지 긴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고 있는 남편을 보는게 답답했지만 남편 말대로 나는 눈을 감기로 했다. 설거지를 내 맘에 안 들게 해도 그릇을 제자리에 정리해 두지 않아도 당분간 안 보이는 척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