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추억
집에서는 홀로 있을 수도 없던 나이
그때 엄마는 동네 작은 미술 교습소를 찾아냈다.
그곳의 이름은 고흐의 방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고흐 아저씨네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물감을 짜고 목탄을 문대며 그림에 눈을 떴다.
처음 아크릴 물감으로 사이프러스 밀밭을 그린 날
“고흐처럼 될 거에요!”라고 부모님께 외쳤다.
그말이 그땐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몰랐다.
고흐는
화가로 살아갈 용기를 얻기까지
너무나 오래 걸렸고
그 기간 동안 방황하고 실패하고 포기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라는 물음은 지금도
사회에 섞여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번은 자문하는 말일 것이다.
고흐도
한 곳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고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돌고 돌며
그래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천 장이나 그렸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낳은 조각들 속에선
정신을 부여잡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작품들이 많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두 컴컴한 전시장에서
빈센트가 견뎌온 세월들을 따라 걷다가
착한 사마리아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혹자는 정신착란으로 빗대는
고흐 특유의 굴곡진 붓자국이 마치
불타오르는 아지랑이 마냥
절정처럼 피어오르는 듯했다.
슬픔을 순수로, 분노를 정열로
그렇게 아주 딴판의 것들로 정화시켜
화폭에 뿜어낸 붓자국들을 보면서
무슨 다짐이라도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고흐는 그저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과 그림을 사랑할 뿐이었다."
전시장 마지막 벽 문구,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았던
그 때 그 아이가 고흐의 방에 다시 들어온 듯 했다.
어떠한 삶을 살아야겠다
나는 어떠해야겠다
무엇을 이루겠다
보다는
그저 해야겠다
고흐처럼 순수해야겠다
내것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