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행복할 때 ①

천 걸음 천변 산책

by 혜성

늦은 저녁을 먹고 집 앞 천변으로 나섰다. 돌다리를 하나하나 짚어 냇물을 건넜다. 천 양쪽으로 보행길이 있지만 돌다리를 건너는 재미에 꼭 맞은편 보행길을 따라 걷는다.


맞은편 길은 산책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 좁은 탓이다. 내가 맞은편 길을 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가한 그곳에서 양옆으로 피어난 풀과 키 작은 나무와 꽃나무들을 본다. 어제는 키 큰 몸에 노란 꽃들이 어둔 밤을 가로등처럼 비추더니, 오늘은 손톱만 한 색색의 들풀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자라 있다. 하루 만에 피지는 않았을 터, 아마 어제는 노란 꽃들이 내 모든 시선을 빼앗아 갔던 모양이다.


고개를 들었다. 짙은 초록의 잎들이 바람과 신나게 놀고 있었다. 오늘 찾아온 선선하고 활달한 바람 손님이 늦은 줄도 모르고 나뭇잎들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나랑도 같이 놀자고 시끄럽게 손짓을 하는 나뭇잎 하나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탱글거렸다. 얼결에 악수를 당한 나뭇잎이 너무 놀라는 것 같아 얼른 손을 뗐다. 내일 또 만나자고 인사하고 계속 걸었다.


앞을 보고 걷는데, 왼편의 무언가가 내 시선을 세게 당겼다. 뭐지?

찰랑이는 물결이었다. 왼편 도롯가 가로등이 냇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있었다. 어두움을 이불 삼아 자려는 냇물을 가로등 불빛이 자꾸 흔들어 깨웠다. 졸린 냇물을 가만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가로등도 밤샘 보초를 서는 동안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자꾸만 발장구를 치는 가로등을 냇물은 맘씨도 좋게 가만두었다. 나도 조용히 미소를 짓고 발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던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앞에서 흰 털 뭉치가 걸어온다. 네 발로 걷다가 뒷다리 하나를 올려 분비물을 뿌린다. 몇 발짝 더 걷는 것 같더니 다시 아까의 다리를 올려 분비물을 뿌린다. 이 길이 초행인가. 흰 털 뭉치는 코로 식물들 사이사이를 확인하려 하는데, 목줄의 주인이 자꾸 길을 재촉한다. 흰 털 뭉치는 다시 올린 뒷다리를 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목줄에 끌려 내 쪽으로 더 가까워 왔다. 흰 털 뭉치가 탐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grass-3206938_1280.jpg


깊숙해진 5월, 깊어진 아카시아 꽃향기, 짙어진 초록.

기다림도 애탐도 좌절도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해준 내 천변 산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울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