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해결하기
일요일 한낮.
안방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이불만 흐물흐물 접혀져 있다. 남편이 드디어 일어났나 보다. 오늘 처음 침대에서 나온 그다.
“안녕.”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선 내게 인사를 한다.
“안녕.”
나도 인사를 한다. 그리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쓰레기 정리, 싱크대 정리, 이런 일요일 업무 외에 오늘은 두 가지 특별 업무가 있었다. ① 샤워기 호스 바꾸기 ② 배달 온 20킬로그램 흰쌀을 통에 담아서 김치냉장고에 넣기.
실은 두 업무 모두 남편이 오늘 할 것으로 기대했던 일이었다. 하나는 기술적인 일, 다른 하나는 힘을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미뤘다기보다 남편이 자신의 독보적 효능감을 느끼는 분야인 것 같아 지금껏 슬쩍 부탁하는 척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물론 내 허리가 안 좋기 때문에 무거운 걸 들고 빼는 일을 하면서 눈물 찔끔거린 적이 많아 언제부턴가 남편에게 해달라 부탁하곤 했다.
남편이 늦잠에서 쉬 깰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든 오후 한 시. 샤워기 호스가 배달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너무너무 기다렸던 호스였다. 남편이 깰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허겁지겁 포장지를 풀고 호스를 빼냈다. 새하얀 줄이 나타났다. 무겁지도 거추장스러운 느낌도 없이 그냥 끼우면 될 것 같은 심플함. 햐, 실물 영접을 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동봉된 설명서도 없는 걸 보니 그냥 끼우면 되나 보다 싶었다.
먼저 스패너를 이용해 호스를 샤워기 본체에서 빼냈다. 이게 안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도구란 게 이렇게 편리한 거였다. 위대한 호모 파베르여! 손에 힘도 안 들어간 것 같은데 조여진 나사가 금방 풀렸다.
나는 신이 나서 호스의 한쪽 구멍을 나사에 끼워서 돌렸다. 딱 잘 맞아 들어갔다. 야호!
이번에는 나머지 한쪽 구멍에 어제 사둔 샤워기 헤드를 돌려 끼웠다. 이번에도 잘 맞았다.
이제 물을 틀고 작업의 완성도를 확인할 차례.
얏!
그런데 이게 웬일. 샤워기 헤드와 호스 사이 연결 부분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그것도 많이. 침착해. 처음부터 다시 해보는 거야.
나는 풀고 다시 조였다. 고무패킹 유무도 확인했다. 문제없었다. 그리고 물을 틀었다. 똑같았다. 줄줄 흘렀다.
이제는 진짜 차분해질 시기였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포장지 속을 살폈다. 설명서는 없었다. 포장지를 돌리니 뒷면에 설명 글이 있었다. 아, 이걸 몰랐구나. 나의 실수는 1번 사항에 있었다. 브랜드명이 있는 쪽이 샤워기 본체가 아니라 샤워기 헤드와 맞물려야 했다. 그렇구나. 시선이 많은 가는 부분에 브랜드명을 입력하는 거로군.
다시 화장실로 돌아왔다. 호스를 풀고 상하를 바꾸어 끼웠다. 그리고 물을 틀었다. 이번에는 물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속이 후련했다. 나는 그대로 거실 화장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1번 사항을 염두에 두고 호스를 갈아 끼웠다. 두 번째 작업은 3분 안에 뚝딱 끝났다. 새하얀 새 호스와 새 샤워기 헤드로 교체된 샤워실이 흰 눈을 맞은 소나무처럼 단단해 보였다.
자신감이 솟았다. 나의 눈은 사냥감을 찾는 어미 사자의 눈처럼 이글거렸다. 이번에는 뭘 하지?
김치냉장고 앞에 세워둔, 입이 벌어진 쌀가마니가 보였다.
‘나를 정리해 보는 건 어때?’
쌀가마니가 나에게 윙크를 했다.
“좋다.” 통에 쌀을 너무 가득만 담지 않으면 바닥에서 통을 들어 올려 김치냉장고 속 가장 안쪽에 넣는 일은 허리에 무리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요령껏 하면 된다.
벌어진 쌀가마니 입을 구겨진 곳 없이 반듯하게 벌렸다. 입 바로 앞에 김치통을 바짝 갖다 댔다. 사기 국그릇으로 쌀가마니에서 쌀을 퍼서 김치통으로 옮겼다. 김치통이 3분의 2쯤 찼다. 딱 두 그릇만 더 퍼서 5분의 4만큼 쌀통을 채우고 뚜껑을 닫았다.
이제 김치냉장고 안으로 넣을 차례다. 끙! 힘을 주고 통을 들었다. 한 번에 가슴께까지 통을들어 올린 뒤 입을 쩍 벌린 김치냉장고 쪽으로 통을 내렸다. 그리고 쑤욱 저 1층 안쪽까지 통을 내려 안착시켰다.
휴.
안심의 숨인지 한숨인지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샤워기 호스를 갈아 끼운 기쁨의 에너지가 아침에 마신 카페인과 뒤섞여 온몸을 가뿐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남은 쌀도 다른 통 안에 비워서 채운 뒤 마찬가지로 김치냉장고 안으로 넣었다. 아까 넣은 쌀통 위에 올렸다.
탁탁. 나는 손바닥을 맞부딪쳐 털었다. 화장실은 깨끗해졌고 마찬가지로 주방도 깔끔해졌다. 남들이 보면 원래 그대로겠지만, 내 눈엔 그렇게 되기까지의 노력이 엿보인다.
쌀가마니를 접어 휴지통에 집어넣고 바닥을 다 닦으니 남편이 나온다. 커다란 입을 상하로 길게 벌려서 깜짝 놀랐다는 표현을 한다.
“허걱. 두 시야.”
그렇다. 한 시간여를 샤워기 호스 교체와 쌀통 옮겨놓기라는 챌린지를 수행했던 것이다.
“신랑, 내가 뭘 했는지 맞춰봐.”
나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남편에게 퀴즈를 냈다.
“뭐가 아주 깨끗해졌네.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정리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뭔데?”
나는 샤워기 호스를 갈고, 쌀을 정리해 넣었다고 답했다.
“이야, 우리 각시 힘세네. 대단해요.”
맞다. 내 몸과 머리 둘 다를 써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한 오늘. 거울 속 내가 꽤 예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