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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an 13. 2022

"슬퍼서 외롭다"라고 썼다

친구여서 다가갈 수 없는 그의 슬픔을 대하는 자세

가족 같은 세 사람이 뭉쳤다. 사는 곳도 나이도 다르다. 가장 어린 나 C가 좀 억울하지만 셋은 그냥 친구로 보인다. 네 살 터울씩이니 A와 나는 무려 여덟 살 차이가 나지만 어떠랴. 오랜만에 만나 웃고 떠들며 다음 만날 날을 기약하는 이런 사이를 위해 ‘친구’라는 단어가 있잖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자식자랑을 하는 팔푼이거나 자기비하를 하는 칠푼이가 되는,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다.


분기별로 한 번씩은 만나는 우리 ABC(나이순으로도 미모순으로도 체력순으로도)는 여름의 회동 이후 가을 만남을 기약했는데, 다들 바빠 화려한 단풍철이 지나가는 걸 아슬아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 이러다 외국 가서 사는 D가 오는 연말에나 뭉치는 거 아냐? 아니지, 코로나19가 이렇게 계속되는 추세면 그나마 D의 입국도 어그러지고 연말연시 바쁘다고 해를 넘길 수도 있겠어, 흑. 이러며 우리는 잦은 통화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다 기어이 우리는 폭발하고 말았다. 바쁜 만큼 사는 게 울컥해지는 때가 생리주기처럼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화산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니 매일 만나지 못할 중요한 사정들이 별것도 아닌 하찮은 핑곗거리로 전락했다. 오늘의 집 밖 행진을 막을 것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만추에 떨어지는 바삭한 갈색 잎사귀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기차표를 끊었다. 혼자 하는 여행 기분이 나서인지 기차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신중히 골라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절의 독서>. 기차에 몸을 싣고 자리를 찾아 앉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띠지를 책갈피 삼아 꽂은 페이지를 펼치니 저자 김영란이 사춘기 시절 읽으며 작가의 꿈을 꾸었던 <작은 아씨들>에 이어 그를 성인으로 나아가게 만든 책 <제인 에어>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나 중년의 어귀에 서 있는데 여전히 사춘기의 풍랑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느 시절 몇 페이지를 적고 있는가. 오늘의 갑작스러운 외출은 이 핑크색 책으로 기록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덧 B가 사는 역에 도착했다. B는 미리 도착한 A를 조수석에 태우고 내가 내리는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마중을 나왔다. 세 여인을 태운 차는 누구의 말인지도 모르고 누구의 질문인지 답인지도 모르는 소리들로 금방 하애졌다. 시끄러움, 숨이 넘어갈 듯한 껄껄거림, 기억나지 않는 내용의 수다…. ABC 회동은 오늘도 여전했다. 한 시간 반을 차 속에서 헤매다 들어간 이자카야 작은 룸에서 처음의 예의 차린 저음의 소곤거림은 문과 벽을 뚫고 옆 테이블까지 울릴 웅장한 고음의 외침으로 수직상승했고, 후레쉬보다 더 청량한 깔깔 웃음은 빨간모자보다 쓰디쓴 울음으로 하강곡선을 그렸다. 챙, 챙, 챙, 세 여인은 무언의 적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고 장렬히 전사했다.


가장 먼저 눈을 떠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C는 A와 B를 깨우고 말았다. 새벽 6시로 향해 가는 시각이었다. 먼 이야기인 듯 어제의 우리를 회상하다가 아침 해가 눈을 부시게 하자 B는 커피머신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원두 갈리는 소리가 탁한 머리를 맑게 해 주는 것 같았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두 잔째 내리는 동안 우리의 피곤함은 어느새 어제와는 다른 담백한 수다 속에 묻혔다. 모닝커피보다 더 진하고 더 일찍 시작하는 모닝수다는 매운탕처럼 칼칼했던 어젯밤 수다의 짭짜름함을 밖으로 배출했다.


한바탕 독소를 빼낸 ABC는 진짜 해장을 하러 나섰다. 해장은 베트남쌀국수다. 무조건이다. A는 똠냥쌀국수, B는 양지쌀국수, C는 매운쌀국수를 개성대로 시키고 초조하게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이 유일하게 조용한 시간이다. 마침내 나온 쌀국수를 뜨겁지만 않으면 가슴에 품고 후루룩 마시고 싶었다. 평양냉면이었다면 그리했을 터인데…. 그나마 뜨거운 쌀국수여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어쩌면 다행이다 하면서 맹렬히 흡입했다. 명치끝이 조여 오는 느낌에 마지막 한 젓가락을 아쉽게 남기고 말았다. 그래, 아쉬워야 또 오고 싶다. 우리는 예매한 기차표 시간이 되기 한 시간 여유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마시러 이동했다.


베트남쌀국수에 뜨거워진 알코올이 정수리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높다란 의자 등에 기대어 널브러졌다. A는 화장실에 가고 내 앞에는 B가 앉아 있었다. 눈이 풀린 내게 B는 말한다.

“감정이 올라올 때 적어 보라고 네가 그랬잖아. 며칠 전 밤에 핸드폰 메모에 몇 자를 적었어. 아침에 일어나 그걸 읽으니 누가 볼까 무섭더라. 바로 지워 버렸어.”

“뭐라고 적었는데?”

“슬퍼서 외롭다라고.”

슬퍼서 외롭다라니. 외로워서 슬프다도 아니고. 슬퍼서 외롭다… 슬퍼서 외롭다…. 그 말을 듣는데 왜 그렇게 슬퍼지는지. 슬퍼서 외로운 그 감정이 왜 그리 생생히 느껴지는지. 참으로 슬프고 참으로 외로운 말이었다.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도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잘 꾸리며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때로 기특하기도 했다. 적절히 감정을 조절하면서, 이전에 않던 일기 쓰기도 하고 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생각보다 잘 살고 있음에 놀라워했다. 분명 아침 모닝수다에서도 달라진 나, 기특해진 나를 하나의 소재로 끼워 넣었다. 그런데 B의 슬퍼서 외롭다라는 한마디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우리는 왜 이곳에 모였는지 분명해졌다. 우리는 슬프고, 우리는 외로운 것이다.


그러나 진짜 슬픔은 다른 데 있었다. 정말 슬픈 건, 서로에게 차마 슬픔의 정체를 물을 수 없다는 거였다. 나름의 슬픔을 함께의 껄껄거림으로 잠시 잊고 매일을 잘 지내는 것처럼 상대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혼자 묻게 되었다. ABC는 늘 웃으며 전화를 받고 늘 시끄럽게 웃으며 서로를 반기고 늘 격하게 상대의 말에 동의의 리액션을 한다. 우리는 너무도 서로를 사랑해서 상대방을 위해 함박웃음을 짓고 예쁘다 잘했다 상대방에게 엄지 척을 해 보인다. 나의 슬픔은 숨겨야 하고, 남의 슬픔은 알아도 모른 체해 줘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배려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할 말을 하러, 그렇게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러 셋이 뭉쳐도 우리는 결국 각자의 슬픔을 꺼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슬픔이 내 슬픔을 업고 더 무거워질까 봐서.


슬퍼서 외롭다. 그 말을 듣고 기차에 올라 집에 돌아가는 세 시간 동안, 그리고 마침 해가 지며 주황 노을이 창을 물들이는 걸 하릴없이 보면서, 참 헛헛했다. 슬퍼서 외로운 B의 슬픔과 외로움의 크기가 짐작이 되지 않아서, 마찬가지로 A의 슬픔과 외로움이 어떤 색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리고 나의 슬픔과 외로움이 무언지 정체를 잘 모르겠어서 쓸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것이다. D가 들어와 삼각형이 사각형으로 변신해 밤새 울고 웃고를 반복할 ABCD의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차마 그 슬픔의 실체를 파 볼 수는 없어도, 슬픔을 감춘 얼굴을 따뜻이 바라보고 손 잡고 같이 잠들 수는 있으니까.


나의 슬픔도 모르는데 너의 슬픔은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러니 그 슬픔 함께하겠다는 오만한 친구 노릇 애초에 접고, 그냥 생각 없이 헤헤 웃는 친구 노릇만 이어 가련다. 그리고 정말 생각 없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자신의 슬픔 꾹꾹 누르고 껄껄 웃으며 거기 그 자리에 있는 나의 A와 B에게 그리고 D에게 웃음으로 화답하리라. 그리하여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삼각형을 또 사각형을 유지하리라. 네 거 내 거 구분 없는 거창한 깐부는 아니어도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우린, 다름 아닌 친구니까.




이 글을 쓰고 해가 바뀌었다. 결국 D는 크리스마스에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사각형은커녕 삼각형도 우리는 이후로 만들지 못했다. 또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우리가 유난히 맑은 하늘의 오늘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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