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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Nov 10. 2022

그들이 나누는 사계절

거실 통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소파 안쪽 끝까지 닿았다. 이러다 식탁까지 다가와 같이 커피 한잔하자고 청할지도 모르겠다. 2월 말에 이사를 와 지금이 11월이니 아직 한겨울을 겪어 보지 못한 이 집이 아직 다 못한 자기소개를 겨우내 어떻게 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흔히들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 알기 위해서는 사계절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 또한 사계절을 지내 봐야 안다고 한다. 1년이라고 해도 좋은데, 왜 굳이 사계절일까. 누군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 365일 열두 달이라는 정량적 기간이 필요하다기보다 생명이 태어났다가 태어난 자리로 돌아가는 그 기적 같은 순환이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씨를 뿌리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잎이 지고 꽁꽁 얼었다가 다시 해동하는 그 열두 달은 매일이 다른 모습이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도 달이 뜨고 지는 자리도 매일 다르다. 기온은 같아도 4월에 맞는 바람과 9월에 맞는 바람은 같은 결일 수 없다. 똑같은 양의 비가 내려도 봄비와 가을비의 촉촉함이 같지 않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생명이 피고 지는 이 장엄한 순환의 변화 속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는 한껏 부풀고 여름에는 더위에 지치고 가을에는 고독에 잠기다가 겨울에는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지낼 수 있다. 물론 전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누군가는 봄과 여름에 침잠하고 가을에 겨우 눈을 떠 겨울에 소생하기도 하니까.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그것은 자기만의 계절 나기이고 자연과의 교감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연과 더불어 변화하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다.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계절 나기를 보내는 걸 서로 지켜보면서 처음에는 몰랐던 면을 발견하고 관계를 재정립한다. 더욱 공고해지기도 하고 관계를 그만 정리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알아가며 계속 만날지를 결정할 최소한의 기간 사계절. 나는 평생을 약속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기까지 정확히 86일이 걸렸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서는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비혼주의도 아니면서 나이 차도록 제 짝을 찾지 못해 부모님의 발품에 기댔을 뿐이다. 살다 보면 맞춰진다는 어른들 말씀을 비판도 않고 받아들이며 양가에서 서두르는 대로 맡겼더니 어느새 식장에 들어서 있었고 신혼여행을 떠났고 신혼집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부부가 되기 전에 함께 보낸 계절은 겨울 한 철이다.


대뜸 결혼 날짜를 잡았다며 결혼할 사람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친구들은 우리를 보며 축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 나와 따로 만났을 때는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어떻게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 날짜를 잡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한다니 그 사실 자체가 염려스러운 면도 있지만, 평소 나를 알건대 그가 나와 어울리는 스타일의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는 강인하고 사교적인 사람이다. 위아래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며, 술 마시는 자리를 주도하고 시끌벅적 웃고 얘기하는 것을 즐긴다. 맡은 바 일을 똑 부러지게 하고 주관도 강한 편이다. 그런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친구들은, 외모로는 키가 크고 덩치도 있으면서 잘 웃고 목소리가 크며, 성격도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이다. 내가 소개한 사람은 나보다 얼굴이 작은데 쾌활하다기보다 날카로운 이미지에, 술자리를 주도하는 대신 그 자리에 조용히 맞춰 주는 사람이었다. 의견을 뚜렷이 드러내기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이 보기에 나하고 잘 맞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사계절을 열 번은 넘게 지낸 친구들의 공통의 판단이니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동의하는 바가 컸다.


결혼을 하고 맞은 우리의 첫 번째 사계절은 어땠을까. 매일매일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함께하고 있었다. 함께인지 따로인지도 모른 채 같은 공간에 있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공간 이동을 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러 온 전사들. 우리는 분명 같은 임무를 지닌 공동 운명체였지만 왜 그 임무를 맡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함께였다. 처음 맞은 봄은 내가 결혼한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집안임을 알려 주는 계절이었고, 처음 맞은 여름은 우리가 잠시나마 이런 사람일 거야, 라고 기대했던 모습이 지금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계절이었고, 처음 맞은 가을은 이 사람과 맞춰 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오는 계절이었고, 처음 맞은 겨울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라는 이름으로 책임져야 할 새 생명을 품은 계절이었다. 둘이 많이 다른 사람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데 힘들고, 어떻게 맞춰야 할지 갈팡질팡인 첫 번째 사계절이었다. 


우리의 사계절은 그로부터 열세 번이 지났다. 열네 번째의 겨울을 기다리는 지금, 나는 말할 수 있다. 친구들의 걱정은 기우라고. 나는 남편과 잘 맞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뜨겁고 열정적이지만 속은 무르기 그지없는 내유외강의 나.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한결같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한 그루 나무처럼 뚝심 있는 외유내강의 그. 우리는 열세 번의 사계절을 보내며 정반대에 있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때론 버거웠지만 믿음과 존중으로 헤쳐 나갔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둘이 쓸모 있는 하나가 될 길을 찾았으니, 숲을 태울 수도 있을 나의 불꽃은 그라는 나무를 만나 집안을 덥히는 의미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나라는 불꽃을 만나 자신이 한 그루 나무에서 집안을 덥히는 장작으로 부활했다고 그도 생각하면 좋겠다. 


욕심이겠지만 더 많은 사계절을 함께하면서, 우리가 찾은 상생의 온기가 아이들을 넉넉한 품성으로 기르는 난로가 되기를 바란다. 그 온기가 부디 집 밖을 넘어 이웃으로 또 사회로 흘러넘치는 쓸모 있는 에너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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