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성 Jan 04. 2024

선을 지키는 두 사람의 거리 좁히기

상냥한 관계를 원하나요

Dear MS.

너에겐 만난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 있니?

나에겐 네가 그런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너와 내가 삼십년지기 친구거나 최소한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관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올해 3월이고, 12월까지 매달 두 번의 수업 시간에 만나서 인사를 한 정도의 사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꽤 놀랄 수도. 내 감정의 진실성에 의심을 가질 수도 있겠고 말이야.     


내가 처음부터 널 편안하게 생각했나? 한번 돌아봤어. 너를 처음 보았던 그때를.

글쓰기 수업 첫날이었어. 강사님은 수강생들에게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지. 네가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아. 다만 무뚝뚝한 표정에 무언가 불만이 있는 눈동자를 안경 속에서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또렷이 기억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땅바닥에 구겨져 있는 음료수 캔을 툭, 툭, 발로 차듯이 단어들을 내뱉는 네 말투가 생생해.      


내용은 사라지고 내용을 전달하는 그릇의 모양만 기억난다는 게 이상하니? 뭐, 보편적이지 않은 일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 중요한 건 네 첫인상이 내게 강렬했다는 것. 너에 대한 소개를 무어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소개하는 네 표정, 말투, 태도, 그 모든 것이 너에 대한 가장 완벽한 소개가 아니고 무얼까.      

너의 외면과 내면 (사진: 픽사베이)

그런데 말이야. 첫인상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는 게 그 사람에 대한 호의의 표시일까 아닐까. 아니, 질문을 문맥과 일관성 있게 다시 해볼게. 첫인상이 강렬하다는 건 그 사람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내 경우엔 엑스야. 그러니까 너는 내게 편한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껍질이 우둘투둘 못생겨서 만지고 싶지 않은 아보카도 같은 사람. 미안해. 너에 대한 내 인상이 이래서.     

하지만 너와 갑작스러운 가을 데이트를 하고 나서 네가 정말 아보카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질까. 우리가 비싼 식당에서, 혹은 싼 식당인데 비싼 메뉴에 포함되어 있는 아보카도 재료의 요리를 먹게 되면 말이야. 맛이 희한하게 맹맹한데 건강에 좋다고 하고 살은 또 부들부들해서 어떤 껍질에 감싸 있는지 연상하기 힘들잖아. 너와 함께한 그 오후가 내게는 건강함과 보드라움을 선사한 비싼 요리 같았어. 낯선 음식임에 분명한데 나랑 좀 맞는 느낌?      

     



아, 그래. 이제 좀 알겠다. 내가 너를 편안하다고 생각한 이유를 말이야.

그러니까 너와 함께한 그 시간에 네가 나와 맞는 구석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나는 사람과 쉬 가까워지지 못해. 내가 가깝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나는 말을 조심히 하고 태도에 예의를 장착하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만큼 마음 거리가 가까워진 사람일 테고,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최대한 존중과 배려가 묻어나는 말을 쓰지. 말을 스스럼없이 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욕도 섞어 사용하면서 친밀함을 과시하는 유형의 사람과 나는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너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지

나는 거리두기를 중요시해. 관계에서 선을 지키려 노력하지. 그래서 선을 넘나들고 거리두기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느껴.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다가오면서 가까워진 거리를 다시 적정선으로 늘리기 위해 옆으로 비켜나지.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까워짐은 내게 두려움이라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분명 네가 먼저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고 싶다고 했어. 그렇다고 네가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사람은 아니었나 봐. 너는 내가 선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짐작하고서 동행하는 그 길에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어. 버스에 올라탔는데 내게 어느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하고는 너는 떨어진 다른 좌석에 앉았지. 보통은 자리도 비었는데 2인석 옆옆이 앉으려 하잖아. 나는 그런 네가 신선하기도 했고, 네가 나와 함께하는 그 시간을 조심하고 있다는 걸 살짝 느꼈어. 너의 노력이 나의 성향에 맞춤했기 때문에 감동했어. 만약 내가 친근함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너의 그 행동에 분명 서운해했을 거야.     


넌 내가 불편해하는 지점이 무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어. 그 말은 너 또한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지. 친근함과 친밀함을 내세우며 가까이 훅 들어오는 사람이 너에게도 그리 편하지 않다는 말이지. 네가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날 나는 네가 편해졌어. 나의 거리두기가 그의 거리두기와 맞아떨어진다는 건 서로에게 부담을 덜 느껴도 좋다는 뜻이잖아.     

넌, 문득 창문을 열면 살며시 들어와 목덜미를 간질이는 바람이야 (사진: 픽사베이)

그렇게 우리가 어느 오후를 함께 보내고 돌아온 날부터 나는 가끔 널 생각했어. 너를 떠올리는 일 자체가 답답한 한낮에 사무실에서 일에 몰두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여는 일과 같았어. 창문을 여니 뭉쳐 있던 공기가 바람이 되어 내 목덜미에 스쳤고, 불투명 유리라 잘 보이지 않던 나뭇잎들이 서로에게 반갑다고 재잘재잘거리며 몸인사를 하고 있지 뭐야. 그때의 상쾌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넌 바로 그 상쾌한 찰나였단다.




널 만나기로 한 2시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 혹시 오늘 만났는데, 네가 보여주는 어떤 모습 때문에 내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내가 보여주는 어떤 모습이 너에게 실망감을 주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우리는 겨우 몇 번 만난 사이이고 알아온 날들이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앞으로 알아갈 날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잖아. 그 또한 너와 내가 하기 나름일 테지만 말이야. 새해를 앞두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관계가 내게 생겼다는 것이 기뻐. 알고 보니 그럴 가치가 없는 관계일 수도 있겠고, 어느 한쪽만 마음이 큰 불균형 상태여서 지속하기 힘든 관계일 수도 있겠고,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창문을 열어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 한 점일 뿐일 수도 있을 거야, 닫으면 사라져 버리는.     


그게 뭐 어때서. 그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모든 관계는 그 관계로서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그걸 통해 하나를 배우고 배운 점을 다른 관계에서 적용해 이어가는 순환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나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관계는 순환하니까 (사진: 픽사베이)

너를 만나고 알아갔던 2023년이 내게 행운이었어. 너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기를 바라. 너의 황금 같은 시간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기를 바라. 너의 2024년에 내가 희망의 불씨가 되었기를 바라. 나에게 네가 그랬듯이 말이야. 고마워. 발전된 모습으로 2024년에 만나자.      


2024년을 기다리는 2023년 12월 어느 날에.

매거진의 이전글 연기 속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