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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l 04. 2024

중3 아들의 기말고사 분투기 - 난생처음 한문 시험

포기도 전략이다!

승리야, 

지금쯤 한창 한자들과 씨름하고 있겠네. 


크크.

이런 웃음 미안하지만, 엄마의 “그냥 포기해.”라는 말에 울상이 되었던 네 얼굴을 떠올리니 슬며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있어야지. 크크크.


넌 엄마의 “그냥 포기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싶었지. 못 외운 걸 혼내시는 건가? 한문이 아니고 설마 나를 포기하는 건가…? 넌 새우 눈을 똥그랗게 만들어서 이렇게 물었어.


“한문 점수가 40점, 이렇게 나와도 괜찮아?”

(‘아, 물론 40점은 예쁜 숫자는 아니지. … 그런데, 너 스카도 다니고 기말고사 준비한다고 좀 티를 내지 않았었니…???’)


하지만 나는 예상보다 낮은 네 현실 점수에 당황스러움을 쏙쏙 숨기며, 배짱 있게 말했어.

“그럼, 당연하지. 그냥 버려. 차라리 역사 100점에 올인하자.


준비가 아예 안 된 페이지 양을 보니 시험 범위의 3분의 1이 넘었어. 시험 전날 밤 10시에 이걸 외우겠다고? 이미 외웠던 걸 확인하면서도 반은 틀리는데…??? 


“포기도 전략이야.” 


엄마는 이렇게 뱉어놓고 ‘호~ 쫌 멋진데!’ 하며 나란 사람에게 빠져버렸단다. 크크크.


그래도 넌 끝까지 “포기는 안 돼.”라고 혼잣말을 했지. 그리고 한자에는 상형, 지사, 회의, 형성 문자가 있다면서 그 각각의 뜻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엄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지. 

날일(日), 달월(月)은 그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진 상형 문자고, 위상(上) 아래하(下)는 추상적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 만든 지사 문자고, 수풀림(林)은 나무와 나무가 모여 있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회의 문자고…. 아, 승리야, 넌 정말 포기를 모르는 아이구나, 쩝.

 


승리야,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 올해 1월이야. (이 대목에서 엄마가 고백하자면, 어렸을 때 다른 친구들이 눈높이 한자, 장원 한자 할 때 너만 엄마와 캐치볼을 했던 게 꼭 잘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고 후회를 할랑 말랑 해. 정말 그때 한자를 시작했다면 네가 한문 시험에서 40점을 예상하는 일은 없었을까?? ‘라떼’는 말이야, 한자는 그냥 어찌어찌 알고 읽게 되던데 말이야… 흠.)


그때를 돌아보렴. 어땠니? 마치 다섯 살 난 아이가 그림을 따라 그리듯이 한일(一), 두이(二), 석삼(三)을 노트에 그리고 있었잖니. 그렇게 한자 왕초보인 우리가 무려 기말고사라는 것을 준비하고 있고, 무려 ‘동서남북’, ‘형제’, ‘자매’ 등의 낱말을 쓰고 구별할 수 있고, 무려 40점이라는 점수도 예상하고 있단다. 정말 우리 너무 대단하지 않아? (나만 그런 거야? 넌 40점이 무서운 거야? 엄마는 그게 엄마 점수가 아니라서 태평한 고야?)


크크크.

엄마는 속도 없이 자꾸 웃음이 난다. 갈왕(往)과 집주(住) 앞에서 샤프를 연신 돌리고 있을 네 모습이 자꾸 상상이 되거든. 이따가 집에 와서 어떤 점수를 말할지 사뭇 기대가 돼. 


하지만 말이야, 엄마가 진짜 기대하는 건 다른 거야. 음, 이런 거지.

2학기 한문 시험을 앞두고는 가볍게 시험 범위에 있는 한자를 노트에 적어보는 것.(왜? 이미 매일매일 한자를 써봤거든.)

국어 지문을 읽을 때, 역사 교과서를 읽을 때, 신문을 읽을 때, 이전에는 뜻도 모르고 읽었던 단어들이 온전한 의미를 지니고 다가와 품에 안기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

아예 모르고 시작했던 영역도 매일 한 삽 두 삽 퍼내기 시작하니 깊게 파서 지하수를 만나는 희열을 맛보게 되는 것.


뭐? 엄마 욕심이 너무 과하다고? 포기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지하수를 퍼내라고?

크크크.

그러네, 엄마 욕심이 너무 셌네.


그래도 승리니까 엄마는 끝까지 포기 못 해. 승리 네가 포기를 모르는 아이니까.

오늘도 고마워, 승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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