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예술의 주름들'을 읽고 있는데 시오타 치하루의 실로 공간을 채운 전시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시오타 치하루는 자신의 실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치 회화에서의 선을 그리는 것처럼, 실을 엮는 것을 통해서 숨결과 공간을 탐구할 수 있다. 실의 선들을 모아 면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주의 세계로 확장되는 듯한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실 설치 작업은 나아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한다" 만일 자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실 작업이 완성된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도 묻고 싶었다.
'예술의 주름들' 107p.
실을 통한 관계성을 얘기했던 한강의 수상소감이 떠오르면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글을 쓴 나희덕시인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시점이 궁금했다. 더 나아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때란 무엇일까.
탁자 위에 사물이 놓여 있다.
ㅡ보고 그리세요
라는 말을 들으면 몹시 난감하다.
덩어리를 지닌 저것을 어떻게 보이는 데로 평면에 구체화시키는가. 그래도 종이 위에 어떤 동작을 취한다. 선을 그리던 원을 그리든. 반복된 선은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어설픈 그림을 보면서 수정을 하고 싶지만 어디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모르겠다. 선을 그리지 못하고 연필을 든 손이 주저한다.
완성은 더 이상 손댈 것 없는 것이겠지.
깨어진 벽돌, 구겨진 비닐은 처음의 모습에서는 망가져있다. 그리는 입장에는 모나거나 흠집까지도 완성으로 보인다. 나는 완성된 것들의 소비하는 달인이고 생산해 내는 것은 소비의 흔적들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생산자 감정으로 전환된다. 비뚤고 못난 그림은 완성을 지향하는 동작으로 남는다.
예습을 접어둔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아두는 것은 섣부른 지식이 될 것 같아서 나의 그림이 틀리도록 놓아둔다.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내 눈에도 내가 그린 것은 균형이 맞지 않고 입체감이 부족하고 거칠다.
왜 그런가?
의문을 맞이하려고 사전 학습을 하지 않는다.
그리는 과정에서 어떻게 표현할지의 질문과
무엇이 부족하고 잘못되었지의 고민이 쌓여서
선생님의 터치로 달라지는 그림에서 답을 하나씩 찾아낸다. 틀려야 답이 더 잘 보인다.
난감했던 시간을 누르고 의문을 널어놓은 후에 학습은 환하게 다가온다.
선을 그리다가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시오타 치하루의 얘기. 그 얘기를 실어 준 나희덕의 순간.
시오타 치하루에 영감을 받았다던 한강의 말.
실처럼 엉켜서, 한참 먼 나에게로 왔다.
'더 나아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때'란, 계속 만들어내는 기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아갈 공간이 허다한 날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