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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약사 Feb 04. 2021

드셔 보셨나요?

드시는 약도 개인정보입니다

"드셔 보셨나요?"


신입 약사일 때는 이 질문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근무했던 약국에 환자가 많았던 이유도 있었고, 이 처방에 대해서 내가 환자에게 덧붙일만한 말도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대부분의 환자분들의 경우는 이 방법이 통했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꼼수가 반복되면 실수가 생기게 되지요.


'노레보'라는 약이 있습니다. 사후 피임약인데요, 피치 못할 상황으로 피임에 실패하셨을 경우 의사의 처방으로 복용이 가능한 약입니다. 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복용하는 것이 원칙이고요, 시간이 늦어질수록 피임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고용량의 호르몬제이기 때문에 드시고 울렁거림이나 구역질이 날 수 있지만, 약을 드시고 금방 구토를 하시면 약효가 없으니 구토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드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죠. 알고 있는 내용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여느 때와 같이 바쁜 날이었습니다. 기계적으로 처방조제를 하고, 조제된 약이 쌓이면 하나씩 들고나가서 복약지도를 했었는데요. 문제의 노레보 처방전도 그 사이에 끼어있었습니다. 


"ㅇㅇㅇ님"


성함을 부르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분이 투약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습관적으로


"드셔 보셨죠?"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색하게 3초 정도 정적이 지나간 다음


"..... 네"


다행히 환자분은 화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저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이후로는 '드셔 보셨나요?'라는 질문은 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대에게 실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약국을 하다 보면 본인이 먹는 약을 알려달라는 전화를 종종 받게 됩니다. 흔히 의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약물 복용 데이터도 엄연히 개인정보입니다. 때문에 유선상으로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분께 함부로 알려드리는 것은 위법의 소지가 있어서 안된다고 안내를 해 드립니다. 그러면 역정을 내시는 분들도 많죠


"아니 내가 그 약국에서 약을 맨날 타는데 왜 안돼?"


"다른 병원 왔는데, 원래 어떤 약 먹었는지 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참으로 난감한 부분입니다. 복약을 할 때 항상 약봉투에 약 이름, 성분이 다 들어가게 출력을 해 드리지만, 보통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거 같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중년 여성분이 약국으로 들어오셔서 약을 하나 내밀어서 보여주십니다. 얼핏 봐도 비아그라와 같은 해피드럭(happy drug)의 일종으로 보였습니다.


*해피드럭이란 비아그라, 시알리스와 같은 약을 의미합니다*


"이거 우리 남편이 먹는 약인데 무슨 약이에요?"


이런 경우도 참으로 난감합니다. 함부로 알려드리자니 인권침해(?)라 생각되고, 또 남편분이라고 하니 안 알려드리기도 어렵고. 괜히 알려드렸다가 저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길 거 같기도 하고, 약사라는 전문가로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제 약사 인생의 몇 안 되는 위기상황 중 하나였습니다.


"혈관을 확장시키는 약입니다... 한 번씩 필요할 때 드시는 거 같네요."


"혈관 확장이면 혈압약이에요?"


"혈관을 확장시키는 약이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로 처방받으셨는지는 남편분께 여쭤봐야 할거 같습니다."


그날 저는 약사로서의 윤리를 어기지 않으면서 한 남성의 인권(?)을 지켜내었습니다. 이름 모를 어딘가에 사시는 해피드럭 드시는 남편분. 제 답변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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