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의 시작, 서검은구록(7)

김용 문학 속으로

by 주애령

<서검은구록>의 진가락이 처한 딜레마


주인공 진가락은 젊지만 홍화회 총타주이자 무공도 인격도 강호에서 존경받는 경지의 인물이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진가락도 아직 청춘이기에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복잡한 감정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품이 전개되고 위구르로 옮겨가면서 안팎으로 위기를 맞는다. 마음속으로만 사모하던 곽청동을 잊기 위해 속앓이를 하기도 하고 친형 건륭제의 배신으로 무림 최고수 장소중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진가락은 중국 왕조에 맞서 싸우다 멸망했던 나라에 숨겨진 무공을 연마하고 나서야 겨우 악당 장소중을 물리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자>에 나오는 소 잡는 백정 이야기에서 착안된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무공이었다. <장자>의 핵심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가락의 이후 행로가 <장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대는 한 마리 나비가 되었다’는 향향공주의 비문에도 내비쳐진다. 결국 진가락이 <장자>의 사상이 담긴 포정해우를 배우는 것은 절대적 명분으로 내세워지는 반청복명의 대의를 접고 은거하리라는 암시인 것이다.


<서검은구록> 이후에 발표된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이 김용은 삼각관계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흔히 문학 작품 속의 삼각관계는 두 명의 상대가 각기 상징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상징한다. 향향공주가 자결한 뒤 진가락과 곽청동은 상실감과 좌절에 빠져 서로 헤어질 수도 없고 결혼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진다. 향향공주의 죽음으로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삼각관계에 빠진 채 <서검은구록>은 마무리된다. 이러한 결말은 이민족 왕조에 투항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한족 지식인의 딜레마를 상징하는 셈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보는 <서검은구록>


<서검은구록>도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개중 최초로 거론되는 예는 1960년 홍콩에서 제작된 3부작 드라마다. 연재가 끝난 뒤 불과 4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무협 팬들은 홍콩의 감독 허안화가 2부작 영화로 만든 1988년작을 명작으로 친다. 안타깝게도 허안화 감독 버전의 <서검은구록>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무협이 대중의 일회용 놀잇거리쯤으로 여겨지는 터라 꼼꼼하게 아카이빙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인터넷을 뒤지면 김용의 작품을 아끼는 독자들의 노력이 반영된 블로그들을 볼 수 있다.


초원 감독의 1981년작 <서검은구록>도 비교적 지명도가 있다. 2000년대 쇼브라더스 영화 회고 붐이 일면서 한국에도 DVD로 출시되었다. 초원 감독다운 화려한 세트와 물량이 돋보이며 진가락의 절기 백화착권도 나름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주인공 진가락은 무술 연기로 유명한 적룡이 맡았다. 원작에서 진가락은 우락부락한 무인이 아니라 관옥같이 고운 선비로 그려지기에 당시 미스 캐스팅이라는 지적이 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적룡의 연기는 이후 정소추 등으로 이어지는 역대 진가락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원 감독 버전 <서검은구록>은 사랑 이야기를 과감히 삭제하고 주중영이 강호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죽이거나 건륭제가 홍화회 비밀 회원인 기녀에 속아 납치되는 이야기 위주로 꾸몄다. 위구르인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후 <서검은구록>은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정소추는 얼굴이 닮았다는 설정을 이용해 진가락, 건륭제, 복강안 등 무려 1인 3역을 해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예는 2009년 중국 호남TV의 드라마 버전으로 진가락의 비중은 다소 축소되고 정소추가 건륭제를 맡았다. 이 드라마의 진가락은 막중한 책임을 진 총타주라기보다는 호기심 많은 평범하고 가벼운 청년으로 묘사된다. 옹정제가 부친 강희제를 살해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야사도 그려진다. 최근 중국 드라마계의 옹정제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원작이 다루는 한인과 위구르인의 결속 부분이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의 우려를 사고 있는 신강 위구르 지역의 정치적 갈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중국의 정치적 사정이 복잡하니 가볍게 단언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적대하며 살아온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진가락이 향향공주를 대했던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대가 원한다면 나도 이슬람교를 믿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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