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필의 시작, 서검은구록(6)

김용 문학 속으로

by 주애령

이렇게 보면 건륭제 한족설은 이민족의 지배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한인들의 정신승리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달리 볼 여지도 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이르는 130여 년에 이르는 청 왕조 통치기간은 유례없는 태평성대였다.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비록 문자의 옥 등 지식인 탄압도 심했지만, 가난한 백성들 입장에서 책을 검열하거나 압수하는 것이 생계 문제는 아니다. 조상을 약탈하고 학살했던 이민족이 실은 자신들과 같은 핏줄이라고 믿는 것만큼 더한 지지의 표현이 있을까.


호화로운 남방 순행, 신강 위구르와 티베트를 비롯한 서역 정벌, 학문과 경제 발전 등 화려한 업적을 남긴 건륭제에 대한 백성들의 실제 호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검은구록>의 건륭제는 소인배로 그려진다. 홍화회 회원인 기녀에 반해 어이없이 납치되기도 하고 진가락과 맺은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긴다. 심지어 처남댁과 밀통하여 아들을 낳고 진가락의 연인 향향공주를 억지로 잡아두어 자살하게끔 한다.


이러한 설정에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건륭제의 처조카인 복강안이 실은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강안은 건륭제의 엄청난 총애를 받으며 최고 권력을 누렸으며, 사후에는 왕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황족이 아니면서 왕 작위를 받은 예는 복강안 외에는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건륭제가 복강안 모친의 미모를 탐내어 밀통하였다고 한다. 근거로는 복강안이 어릴 적부터 궁 안에서 교육받았으며 잘못을 저질러도 질책 받지 않았고, 복강안의 두 형은 공주를 아내로 맞았지만 가장 총애를 받던 복강안만 부마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륭제 입장에서 복강안과 공주들은 배다른 남매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서검은구록>은 한인과 청인으로 대비되는 선악 구도 위에 진행되지만, 가장 중요 인물인 건륭제가 그 구도에 근본적인 균열을 낸다. 김용은 한족설을 비롯하여 관련된 소문들을 채택하여 결과적으로 건륭제를 호색한이자 소인배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인 황제라고 꼭 명군이라는 법이 없으며 만주인 황제라 하여 모두 암군은 아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선악 여부는 그가 속한 집단의 도덕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과 개인의 선택이 중첩된 결과에 달려 있기 마련이다. 이후 곽정, 양과, 소봉, 영호충 등 김용의 주인공들은 개개인의 성격까지 규정짓는 집단 정체성과 갈등을 빚으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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