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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May 14. 2024

유목과 정주

호텔같은 신도시

이사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보는 신도시 스타일의 아파트 단지입니다. 어느 날 저녁 먹으려 나가는데 중앙유라시아계 남자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 안에 모여 있더군요. 아파트에 사는 듯한 아이들은 옆에서 쳐다보고 있고요. 


"쟤들 (아파트 브랜드명) 살아?"

"아닌 거 같은데..."


아마 아닐 겁니다. 공원이 지극히 적고 평평한 녹지가 거의 없는 이 지역 특성상, 이례적으로 널찍하고 평평한 이 아파트 단지는 외부 아이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전거 타기에 무척 좋거든요. 자전거와 사람이 섞여서 달리다가 언젠가는 큰 사고가 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요. 


얼마 전엔 주민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근방에 사는 외국인들이 밤중에 헌옷을 가져가는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남자들끼리 새벽에 아파트 단지에 들어와서 무섭다는 말도 있고, 엄마와 딸이 유아차에 헌옷을 싣고 가길래 뭐하냐고 물어봤더니 울면서 도망가더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버리려고 내놓은 헌옷에도 주인이 있다는 걸 그들이 알 리는 없겠죠. 관리실에서 러시아어로 안내문 하나 붙여놓으면 해결된다고 댓글 달려다 관뒀습니다. 그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거든요.


최근 이곳에는 외국인 주민이 점점 많아집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있고, 이미 정착한 지 오래인 베트남 청소년들도 꽤 봅니다. 경기 광주에는 얼마 전에 베트남 총리가 직접 방문한 적도 있고요. 중국인 중에서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효율과 편리를 극대화한 한국식 아파트 생활에 한 번 익숙해지면 사실 돌아서기(?) 힘들죠.


사실 한국에서 아파트 단지 내부는 절반 정도 사유지로 인정되는 게 문화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부가 주민들의 사유지처럼 운영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파트가 자산이기 때문이지요. 그 저변에는 깊게 뿌리박고 주류로 군림해온 정주 문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 카피는 거짓이 아닙니다. 정주 문화권에서는 농사를 짓는 땅이 곧 재산입니다. 땅을 재산으로 간주하는 문화는 아파트라는 생활 문화에 그대로 이전되었습니다. 농사짓는 땅이 넓으면 좋을수록 아파트 평수를 늘려야 합니다. 땅에 울타리를 치듯 아파트에 주변에 펜스를 두르고 안을 멋지게 꾸밉니다. 정주 문화에서는 땅이 재산이기 때문이지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놀러(?)오는 외국인들을 잘 보면 중앙유라시아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정주 문화가 아니라 유목 문화권 사람들입니다.  유목 문화에서 땅은 재산이 아닙니다. 가축들이 재산이지요. 유목 문화권에서는 가지고 이동할 수 없는 대상은 재산에 속하기 힘듭니다. 집은 갖고 이동할 수 없지요. 땅도 마찬가지이고, 존재하는 땅에 금을 긋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는 것일 테고요. 현대의 유목 문화권 사람들은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귀금속을 재산으로 칩니다. 아니면 현금이지요. 그렇기에 이들은 도시 변두리의 쓰러져가는 빌라에 산다고 해서 본인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멋지게 꾸민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요. 손에 쥔 금붙이나 현금의 양이 부의 척도니까요.


땅을 재산으로 생각지 않는 유목 문화권의 특징 중 하나가 여행자를 극도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본인이 유목민이기에 항상 여행하는 상태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주객의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주인도 짐 싸서 여행길에 오를 수 있지요. 정주 문화는 다릅니다. '유민'이라는 말이 따로 있듯이, 유랑민을 천대하고 배제하는 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땅 뺏기고 농사도 못 지으며 떠돌아다니니 가난한데다 도둑질을 한다는 편견이 몇백 년째 내려온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손님을 보는 관점, 외부인을 대하는 생각이 이렇듯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동네 식당에 가는데 젊은 베트남 남녀 커플이 앞에서 즐겁게 웃으며 걸어오더군요. 목에 상당히 비싼 카메라를 걸고 있었습니다. 어디에 사진을 찍으러 놀러가는 걸지요.


(다문화라는 말은 우리 입에 친숙해진지 오래지만 그 말 뒤에는 완고한 동화주의가 버티고 있습니다. 말만 다문화지, 어디까지나 한국에 동화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 말이 나온 시절도 벌써 30년 전인데 아직까지 정주 문화만이 우리 사회의 전제라고 우기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외국에 나간 한국인들이 요구받는 상황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국력의 차이가 있지 않냐고요? 그 국력이란 것도 언제든 반전되어 온 게 역사의 교훈이었습니다. 우리가 우월감을 느끼는 동남아 국가들이 10여 년만 지나면 한국을 우습게 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외국 아이들을 낯설게 바라보던 아파트 주민 아이들의 눈길이 떠오릅니다. 아이들끼리는 잘 친해지고 쉽게 어울린다는 생각도 어른들의 선입견일 수 있지요. 교육청과 지자체가 협조해서 아이들끼리 거리에서나마 알고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다소 인위적인 행정이라고 비판받겠지만 경험을 해보니 그렇게라도 시작을 해야 하는 게 맞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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