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김수현이 잘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나치가 진행한 정치의 미학화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아름다움은 단 한 가지이며, 그 외의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치 정치의 미학은 이분법으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것, 추한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 보존되어야 하는 것(순수 게르만 유전자), 척결되어야 하는 것(유대인과 로마족 유전자) 등등.
그래서 같은 시기 예술가들의 주된 목적은 이러한 미학의 이분법에 대한 정면 대결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움은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피카소의 조각나고 일그러진 그림, 미로의 동화적인 추상화, 파울 클레의 ‘역사의 천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존 케이지와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비디오 아트 등등. 이들 미술 작품들은 아름다움이란 보티첼리같은 곱고 잘 빠진 대리석같은 묘사를 넘어 인간의 영혼과 세계관에 충격을 가하는 복합적인 경험이 되고자 했다. 그 목적은 물론 파시즘에 대한 강력한 대안적 세계관이었다. 나는 이것을 ‘미학의 민주화’라고 부르고 싶다. 아름다움의 민주화.
그렇기에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와 파울 클레의 그림이 동시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둘 다 무척 아름답다. 기억해야 할 것은 레니 리펜슈탈은 스스로 ‘나만이 아름답다’고 주장하지만, 파울 클레는 ‘아름다움은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엉망진창인 역사에 휩쓸려 날아가는 역사의 천사 모습은 전통적 입장에서 아름답다고 말하기 애매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어려워한다. 어린 아이가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으로도 보인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이 작품에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다.
레니 리펜슈탈도,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보티첼리의 매끈한 유화도, 카라바조의 추악한 메두사 그림도 모두 내게는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작품들을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름다움에는 주관적 영역이 있으며, 그 영역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공동체에 어울리는 미학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에게 추하게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극단적인 경우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의 주관적 기준은 입맛보다도 깨지기 힘들다. 싫어하던 음식을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하는 경우는 있지만(냉면!) 첫눈에 추하게 생각되는 대상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아름다운 것에는 돈이 따라다닌다. 그렇기에 미학은 정치화되고, 민주화되었다가 이제 자본화되었다. 현대 미술의 난해한 작품들은 돈덩어리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미 피카소를 비롯한 근현대 화가들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말년의 달리는 그 흐름에 적극 몸을 던지기도 했다. 향수나 보석을 디자인했듯이.
문제는 미학의 자본화는 결국 아름다움의 단일화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대중이라는 다수의 전진 속에 소수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쉽게 묻혀진다. 더구나 예술이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소수 귀족의 후원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대중의 취향을 맞추어야 하는 고난도의 임무를 수여받았다. 대중은 상대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대중문화에서는 다수의 취향만이 살아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학은 정치화될 문제에서는 거의 영구적으로 벗어난 듯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다시 다양성을 상실하고 단일화될 위기에 놓였다. 마치 미스코리아 1등을 뽑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