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나치가 되려면 다이어트부터
아름다움에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이제 상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나, 건축물이나, 자연물을 찾으려고 하고 그러한 표현을 자꾸 쓴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기 전에 취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말했듯이 개인마다 미감의 기준은 다르지만 그 기준은 생각보다 유연하다. 다시 오픈 콘크리트 하우스에 사는 내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나는 그 몰취향한 집에서 걸어 나오면서 문득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꾸 보니까 또 뭐 괜찮네.”
실제로 이러한 경험은 흔하다. 처음 볼 때에는 별로인데 자꾸 보니까 나름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 · 1>은 이러한 미감에 대한 시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뭐든지 자꾸 봐야 나름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현대미술의 많은 작품들도 처음 볼 때는 대체 저게 뭔가 싶어도 자꾸 보다보면 미감이 느껴진다. 사실 현대미술의 주된 흐름은 미스코리아 대회처럼 매우 한정된 범위의 아름다움만을 인정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미학을 깨기 위한, 의도적이고 이념적인 시도였다. 미술계뿐만이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세계 대전을 거쳐 1960년대 케이지와 백남준으로 이어지는 해체주의도 크게 보면 아름다움의 민주화를 위한 거대한 운동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발터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미학화가 있었다.
정치란 말했듯이 “권력과 시간과 자원을 분배하는 일련의 원칙과 체제”이다. 다시 말해 정치는 방법론이고, 거기에 여러가지가 있다. 한 사람에게 몰아주면 독재나 왕정이고, 소수 집단에게 몰아주면 과두정 내지 귀족정, 모든 시민이 모여서 결정하면 민주주의라고 한다. 지금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민주주의와 과두정 내지 귀족정을 뒤섞어 사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로 관료와 전문가 집단으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하기로 하는 과정도 민주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쟤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쟤한테 시키자.”고 결정하는 과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면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과두정 내지 귀족정을 적당히 섞어 쓰는 체제의 기본 틀을 완성한다. 나치 독일 직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당시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헌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던 독일 사람들은 민주적 과정을 거쳐 독재를 선택하고 그 결과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이후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히틀러와 나치당은 정치적 선동 과정에 미학을 아주 잘 사용했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도, <의지의 승리>도 무척 아름다운 영화다. 지금 보면 좀 촌스럽기도 하지만. 일체의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것을 일신하고 하얀 피부와 푸른 눈을 지닌 금발의 미남미녀 청년들이 손에 손잡고 푸른 벌판과 숲 속에서 뛰어노는 우리만의 낙원을 만드세! 공포영화 <미드소마> 같긴 하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거의 교과서처럼 통하는 시각적 미학 원칙이 이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상당한 정치적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눈을 뜨면 시각적 자극과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시대 사람들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예술은 어쩌다가 한 번 마주칠 수 있는 매우 드문 경험이었다. 거기에 얹힌 정치적 메시지는 매우 강력했을 것이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기가 막힌 미남 미녀가 “이거 한 번 드셔보실래요?”라고 무언가 권하면, 마치 홀린 듯이 거절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개인적으로 나는 경험한 바 있다. 그것도 여자한테.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092014312095673
이십여 년 전엔가, 블로그를 운영할 때 나는 일부러 이 기사를 가져와서 악플을 달았다. “살이나 빼고 와라, **들아.” 매우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이지만, 나는 히틀러가 관뚜껑을 도로 열고 나와 이들 네오 나치들을 마주친다면 똑같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치즘은 아름다움을 지향했고, 그 아름다움은 단 하나의 취향만을 허용했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납하지 않고 가차없이 ‘청소’했다. 그랬던 총통이 저런 몰취향하고 끔찍한 몰골을 보아 넘길 리가 있나. 그런데 총통아. 그런데 세상이 어찌되었는지 요새 네오 나치들 중에는 비만인뿐만 아니라 비백인에 게이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냥 관 속에 도로 들어가시죠.(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