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아이링이 <색, 계>를 쓴 과정에 대한 심리적 추적이지 사실관계에 대한 글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작가의 창작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장아이링과 후란청의 관계는 유명하다. 둘은 나이차가 있음에도 혼인했고, 혼인은 두 사람이 합의한 서약서 한 장으로 충분했다. 이혼도 장아이링이 보낸 서신 한 장으로 이루어졌다. 후란청은 장아이링의 천재성을 알아보았지만, 이후 그녀를 여러 번 실망시킨데다 이후 해로한 여자도 중국 삼합회의 간부였다. 이에 대해, 장아이링의 자존심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장아이링은 후란청과의 관계 때문에 중국에서 살기 어렵게 되었다. 상하이는 물론 상하이의 문화가 그대로 옮겨진 홍콩도 그녀의 고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아이링은 거처를 미국으로 옮기고 한때 구세군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본인과의 관계 때문에 장아이링이 겪은 고난에 대해, 후란청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와의 관계에 이념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장아이링이 글을 통해 항변한 바 있다 해도, 후란청은 왕정위 정부의 관료였고 이것은 민족반역자임을 의미하는 것을 장아이링이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그녀는 후란청의 도피자금을 대주었고 이 금액은 30만 위안에 이른다. 지금의 느낌으로도 상당한 금액이다. 뒤집어서 당시 장아이링의 작가로서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가늠케 한다.
그럼에도 장아이링은 30년간의 노력을 들여 자기 작품 세계에 후란청과의 관계를 새기는 작업을 했다. 단편 <색, 계>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쥘부채와 같다. 착착 접혀져 있지만 천천히 펼치면 훨씬 넓은 그림과 화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편이지만 장편소설에 버금가는 배경과 설정이 녹아 있다. 장아이링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 주인공 치아즈가 겪어온 삶과 감정, 모험과 여정을 간단히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단 한 개의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치아즈가 카페에서 이 선생을 기다리다가, 보석점에 가고, 다이아몬드를 보고, 이 선생에게 도망가라고 알려주는 것.
장아이링 본인은 부정했지만 이 작품의 소재를 후란청에게 들었을 것이라는 설이 다수다. 실제 미모로 유명했던 스파이 정핑루의 이야기다. 실제 정핑루와 타겟이 된 딩모춘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장아이링이 이 이야기를 30년동안 잡고 있었다는 것이며, 52세가 된 1979년에서야 내놓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문체, 핵심적 장면, 오가는 감정 묘사등은 수십 번 고심하고 다시 썼을 것이다. 장아이링은 평범한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재능과 집요함, 집중력은 문학사에 흔치 않다. 어떤 장면으로 작품을 시작할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끝낼 것인가? 상대를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작가로서 잔인하지만 궁금한 것은 그녀가 30년 동안 이 작품을 쓰면서 후란청을 어떻게 느꼈느냐이다. 작품을 쓰는 원동력은 여러가지다. 어떤 작품은 기쁘고 즐겁게 쓰여지지만 어떤 작품은 시린 이를 악물고 갈면서 쓰여진다. 때로 경쟁심에 불타 쓰기도 하고, 회한에 잠겨 쓰기도 한다. 작품에서 처음부터 치아즈가 느꼈을 감정은, 장아이링이 30년동안 느꼈을 감정의 압축이다. 누가 보아도 후란청은 여자가 인생을 걸 만한 남자가 아니다. 문재가 있었지만 이런 경우 문학적 재능은 도리어 책 잡힐 거리가 된다. 미남도 아니다. 애초에 장아이링을 사랑했는지도 의심이 간다. 처음에 매혹됐겠지만, 세상을 뒤흔들 재주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열등감이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대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 본능적인 열등감이 있다. 하물며 상대가 장아이링이라면.
문제는, 장아이링이 이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과거를 파묻는 대신 작품으로 내놓았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과, 그 사람을 사랑한 이미지는 점점 멀어진다. 장아이링이 사랑한 후란청과 실제 후란청은 점점 거리가 생겼을 것이었다. 그 사이에, 사랑한 사실과 감정의 흔적만 남는다. 대개 사랑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장아이링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그녀의 인생에 오점을 남겼을뿐만 아니라 작품활동도 거의 끊어놓을 뻔한 사람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각인시킨다. 이유 여부를 떠나 후란청은 장아이링으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한 사람이다. 후란청이 그녀에게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한 셈이다. 이 관계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후란청이 장아이링으로 하여금 <색, 계>를 쓰게 했지만, 뒤집어 보면 이 사실은 <색, 계>가 나오지 않았다면 증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반론이 있다. 장아이링이 후란청에게 정핑루 사건을 전해들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후란청은 그 이상 작품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일리있는 말이다. 한 발 더 나아가, 후란청이 아니더라도 장아이링이 다른 곳에서 정핑루 사건을 접했을수도 있다. 어쨌거나 쓰는 입장에서 정보의 근원은 가장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집필을 견인하는 에너지다. 기쁨으로 쓰여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분노와 고통으로 쓰여지는 작품도 있다. ‘귀신이 등 뒤에 와서 불러주듯이’ 쓰여지기도 한다. 독자에게는 다 같아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다 다르다.
장아이링은 후란청에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 당시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상처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아이링은 보통 여자가 아니고, 그러한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오래 고민했을 것이다. 그녀는 상처받은 여성들에 대해 잘 안다. <황금 족쇄>의 주인공처럼 분노로 자신과 가족의 일생을 망가뜨리거나, <첫 번째 향로>의 주인공처럼 사랑에 자신을 던지거나. 다행히 그녀는 문학적 재능을 이용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쓸 수 있었다. 그 일부가 다른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색, 계>로 후란청에게 받은 상처가 작품화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장아이링이 쓴 대부분의 작품들은 평균적인 작가(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졌다는 기준으로)의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제인 오스틴이 오래 살았다 해도 장아이링의 수준에 올라갔을지 궁금하다. 그 훌륭한 작품들 중에서도 <색, 계>는 단연 최고 수준이다. 100년 후를 살아가는 평이한 작가에 불과한 내가 봐도 그러한데, 장아이링 본인이 보면 어떠했을까. 이 작품이야말로 나의 일생일대의 걸작이다. 모든 것이 들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진심이고, 그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썼다. 이 작품이 나의 명성을 후세에 남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랫동안 그녀로 하여금 후란청을 생각할때마다, 쓰디쓴 맛을 남겼을 것이다. 내게 가장 큰 상처와 불명예를 준 남자가 나로 하여금 최고의 걸작을 쓰게 하다니! 30년간 쓰면서도, 발표할지 말지 고민했을 것이다. 이걸 쓰면 그녀의 일생에 영원히 후란청이 남는다. 대단한 작품이 될지 알 수도 없다. 그렇지만 쓰지 않아도 문제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어진다. 어쩌면 장아이링은 30년동안 이 작품을 쓰면서 수없이 오갔던 감정들과 그 사이사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내렸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족했다.'
그가 그녀에게 이걸 쓰게 했다. 이 진술은 물론 과장이다. 그렇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진술은 사실이다. 아무것이나 글쓰기의 동력이 될 수는 없다. 존재와 삶을 위협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진술은 극히 일부 작가들만이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