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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필립 라킨의 <This Be The Verse>

by 주애령

우연찮게 영국 시인 필립 라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워낙 건조하고 직선적으로 쓰는 걸로 유명한데, 그게 매번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는 사람이죠. 한 번 맞은 독자는 여간해서 그를 잊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 중 유명한 작품 하나를 우연히 접하게 됐습니다.



This Be The Verse


They fuck you up, your mum and dad.

They may not mean to, but they do.

They fill you with the faults they had

And add some extra, just for you.


But they were fucked up in their turn

By fools in old-style hats and coats,

Who half the time were soppy-stern

And half at one another’s throats.


Man hands on misery to man.

It deepens like a coastal shelf.

Get out as early as you can,

And don’t have any kids yourself.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48419/this-be-the-verse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시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아이들이 자라서 또 자식을 낳고 상처를 대물림합니다. 그러니 아이는 낳지 마, 라는 메시지죠. 요즘 2, 30대에게 공명할 법한 시 같기도 합니다.


필립 라킨의 국내 번역을 찾아보니 전집이 나와 있습니다. 절판됐더군요. 중고 시장에서 정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중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도서관에서 한 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펼쳤는데 매우 실망했죠.



이것 시이기를


그들이 조진다, 네 신세를, 네 엄마와 아빠 말이다.

본의는 아닐지 모르나, 그들이 정말 그런다.

그들이 너를 채운다 그들이 지닌 결점들로 인해

그리고 더한다 모종의 추가, 바로 너를 위해서.


그러나 그들은 그들대로 신세 조짐당한 신세,

구식 모자와 외투 차림 바보들에 의해,

시간의 반은 몹시 감상적이고

반은 서로의 멱살을 쥐던 것들이지.


사람이 건넨다 비참을 사람에게.

그것 깊어진다 해변의 선반 모양 지층처럼

빠져나가라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그리고 너 자신 아이 따위 하나도 갖지 말아라.




번역을 읽자 처음 이 작품을 원문으로 접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이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번역을 먼저 접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어의 'fuck up'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그걸 '조진다'고 번역한 것은 나름 애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조진다'라는 말에는 '망친다'는 뜻도 있지만 '일이나 물건이 허술해지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fuck'이라는 말이 갖는 속되고 성적인 의미를 살릴 수가 없는 번역이죠.


제목은 '이것 시이기를'라고 번역되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애쓴 결과라고 생각은 되지만 부족함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verse'는 시의 절이나 연, 혹은 운문이라는 형식을 의미합니다. 시 작품 한 편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라킨이 '시'라고 쓰고 싶었다면, 'poem'처럼 하나의 작품 전체 또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지시하는 단어를 썼을 겁니다. 그러나 라킨은 그러지 않았죠. 그리고 본문에 운율은 있지만, 운문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문학 번역은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전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원래 텍스트는 언어와 언어의 경계를 통과하면서 찌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찌그러짐을 회피하면, 번역이 이상해지기 쉽습니다. 모 출판사의 랭보 최초 번역에 대해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그래서 번역을 통과하는 원래 텍스트는, 그 찌그러뜨림을 감수할 수 있을만큼 의미와 내용이 견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는 형식의 특성상 그 견고함이 좀 약하죠. 대부분의 운율이 날아가 버리기 십상입니다.


일부 번역자들이 찌그러짐을 회피하는 이유는 뭘까요. 영어가 갖는 한국에서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권력 구조를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자동번역 덕분에 빠르게 해체중이기는 합니다만). 한국 영문학의 고질병인, 원 텍스트의 위대함과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그리고 그걸 번역하는 본인들의 것도 함께), 의식과 무의식 양쪽에서 작동하는 권위주의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쉽지 않네요. 물론 모든 문학 텍스트는 위대하지만 세익스피어와 제인 오스틴은 영국에서 태어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들어올리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영어로 <율리시즈>를 쓴 제임스 조이스라면 모를까요.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어 텍스트를 찌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저도 모르게 직역에 기운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이 두 가지뿐일 겁니다. "번역자가 영어를 잘 하네. 그리고 필립 라킨도."


창작자의 입장에서 필립 라킨 같은 시인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시를 썼을지 어떻게든 짚어보려고 애쓰면서 다시 번역해봤습니다. 역시 운율은 살리기 어렵네요.



이것은 시의 일부



그 사람들 덕분에 너 좆됐지, 너네 엄마 아빠 말이야.

일부러 한 건 아니지만 그러고 있지.

온갖 잘못으로 널 꽉꽉 채워놓고

여기 자잘한 거 추가요, 널 위해서.


하지만 그들도 오래 전에 좆된 건 마찬가지.

오래된 모자와 코트에 갇힌 바보들 덕분에.

촌스러운 주제에 엄격하게 보이는 데 시간 절반을 쓰고

나머지는 서로 목구멍 쥐는 데 쓰는 사람들이지.


남자는 그 다음 남자에게 비참을 건네주네.

그게 해변을 깎고 파고들어.

되도록 빨리 도망가.

네 자식은 낳지 말고.




물론 부족한 번역입니다. 원문을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은 나름 살렸지만, 이 간단명료한 텍스트가 갖는 역설적인 품위는 살리지 못한 듯해 아쉬워요. 'fuck'은 과감하게 '좆됐다'는 구어로 옮겼습니다. 3연의 'man'을 어떻게 옮기는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라킨이 일부러 'human' 같은, 성별을 막론한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를 쓰지 않고 성별을 특정해서 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뛰어난 작가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읽어서 뜻이 통하는 단어를 쓴다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쓴다는 기준을 사용합니다.


'man'을 일단 직역에 가깝게 '남자'로 했지만, '아버지'로 했어도 라킨의 뜻에 크게 벗어나진 않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어머니가 주는 상처, 아버지가 주는 상처... 어느 쪽이 더 크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라킨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본인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하는 아이에게 상처줄까봐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결심은 일반적인 사회에서 이해받기 어렵습니다. 어디 가서 말을 꺼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상처줄까봐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사람들끼리 마주앉아 서로의 고통을 꺼내놓는 것도 기대하기 힘든 일이죠. 낳으면 자라고, 밝게 크고 또 그렇게 키울 수 있을 거라고 긍정하는 것은 깊은 트라우마 - 태어나서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사랑한 사람에게 영구적인 상처를 입은 아픔 - 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시의 핵심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과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걸 직면하고 글로 쓰는 라킨의 강함.


이 시에서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고통이 느껴진다면 그 번역은 성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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