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사인과 악수!
어느 분야든 구루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다. SF 픽션에서는 테드 창이 그런 사람이다. 그가 SF 분야에서 구루로 평가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내 생각에 한국과 중국 등 SF 불모지에 씨앗을 뿌렸다는 게 그중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선진국이 아닌 나라, 특히 한국에서 SF는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였다. 과학보다는 공학, 공학보다는 기술, 기술의 목적은 이윤, 돈... 이 늘 앞서는 한국. 비전이나 긍지보다 당장 몇천, 몇백만 원이 더 추앙받는 사회. '변화 없이 지금 그대로'를 견지하는 유교 전통 아래 형성된 불합리한 관습과 문화화된 체념. 물론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그러나 SF가 전제하는 꿈과 이상이 걸음을 내딛기에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SF는 갯벌에서 하는 단거리 경주처럼 보였다.
어쨌든 테드 창은 '가능합니다'를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평범한 여성의 목소리로 하드 SF를 전개시켜 보여주었다. 여성의 관점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성 뒤에 수많은 소수자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가능하다면 가능하지 못할 존재가 없다! <소프트웨어 생애의 객체주기>는, 나는 육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테드 창은 한국의 숨죽인 SF 애호 소녀 독자(나를 포함한)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의 단편집에 수록된 첫 번째 단편소설을 읽고 나서 "이 사람 천재 같은데."라고 생각한 순간을. 단편집을 다 읽고 나서는 결론 내렸다. "이 작가는 천재 맞다."
2024년 6월 14일 그가 마포의 모 카페에서 강연 겸 사인회를 가진다는 공지를 보았다. 맙소사, 예약은 이틀 전엔 가에 마감되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한국에 온 테드 창인데, 왔다 갔겠거니라고 넘길 수는 없었다. 적어도 행사장 앞에 서 있으면 가까운 공기라도 마시는 거 아닌다. 무작정 갔다. 그리고 친절한 관계자에게 두 손 모아 빌어서 입장을 허락받았다(그분에게 감사와 영광을). 다소곳하게 맨 뒤에 앉았다. 그리고 친견.
사인하면서, 테드 창과 악수도 나누었다. 그가 말했다. "Thanks for having you here."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건 이쪽이었다. 오래전에 그는 한국에 와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와주어서 감사하다. SF는 선진국이건 개발도상국이건 가능하다는 걸. 그 '어디'에 와준 것은 다름 아닌 테드 창의 작품이다.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도 SF가 써지고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구한말부터 시작된 한국 근대문학은 '단절'로 점철되었다는 면에서 그 고통은 엄청나다). 그런 면에서 테드 창은 한국 SF계에 언제나 머무르며, 환영받는 존재이다. "와 줘서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