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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일기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by 주애령

이 책은 제목처럼 단순하다. 일단 분량이 짧다. 속독가라면 하루만에 앉은 자리에 읽어치울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자신이 실제 겪은 일만 쓴다는 에르노기에 이것은 작가가 겪은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에르노는 상대 남자를 사랑한다고는 잘 말하지 않는다. 대신 '열정'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사랑의 열정. 한국어에는 좀 질척한 느낌을 주는 '애욕'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성욕, 사랑, 열정을 현재적이고 찰나적인 의미로 압축시키기에 적당한 말인 것도 같다.


상대 남자의 신분은 러시아 외교관이라는 것 외에는 드러난 게 없다. 1988년이었으니, 아직 페레스트로이카의 여운이 길게 남은 시기다. 그때 프랑스와 러시아, 유럽의 관계는 그다지 부드럽다고 보긴 어려웠으니, 러시시아 외교관과 프랑스의 이름난 작가 사이의 불륜은 외교상으로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정보 기관에서 다 들여다보고 있었겠지만, 에르노가 이걸 책으로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상대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만의 열정에 대해 쓸 줄은.


그러니 이 책에서 에르노가 쓸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에밀 시오랑이 말하듯이 상상력은 제한될 때 오히려 날개를 편다. 에르노는 자신의 내면과 일상에 대해서만 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에르노 자신에 대해 독자가 매우 잘 알게 된 느낌이 든다. 작가 자신과 매우, 매우 깊이 연결되고 소통하는, 묘하게 신비로운 하룻밤을 온전히 치러낸 듯한 느낌. 에르노가 말하지 않았지만 이 러시아 남자가 어떤 외모이고 어떤 분위기로 그녀를 매료시켰는지 알 듯한 느낌. 영화판 <단순한 열정>은 우크라이나 출신 발레리노를 캐스팅하여 그 분위기에 실존을 부여한다.


짧은 만큼 이 책은 여러 질문을 발생시킨다. 첫째, 사랑은 무엇인가? 결혼, 연애 관계를 발생시켜야만 사랑인가? 둘째, 감정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셋째, 감정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넷째, 감정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갖는가?


경험해본 사람만이 첫째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의 대답은 '아니오'가 되고, 네 번째 질문의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가 될 것이다. 문단의 저조한 관심과 달리 에르노는 수많은 독자들의 편지를 받았는데, 아마도 그 편지들 대부분의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존재해요' '분명히 변화시켜요, 나도 변했어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여정을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결국 이 책은, 감정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감정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분명히. 관계 없이도. 에르노는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중략)...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라고 썼다. 그녀에게 편지를 쓴 독자들은 구절을 직관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무엇인가를, 에르노는 분명히 썼다. 그렇기에 감사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사랑이, 감정이 세상과 나를 더욱 굳게 맺어준다는 것을.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세상의 코드에 눈을 떴듯이. 이렇게 다르게, 생생하게, 모든 것이 깊숙하고 근본적으로 보일 줄이야. '사랑의 묘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묘약인 것이다.


에르노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한 것'. 이것은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이다. 사랑의 대상은 일종의 맥거핀이자 앵커이고, 그림을 그려서 걸어놓을 핑계가 된다. 관계로 맺어진 사랑일지라도, 두 사람(혹은 이상)은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 걸어둔다.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상대의 존재와 영향은 빙글빙글 돌아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온다. 근본적으로 상대는 매개체이자 촉매제이다. 그러나 아무나 그게 될 수는 없다.


아마 에르노는, 러시아 외교관과의 사랑과 열정을 겪고 나서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느낄 것이다. 작가로서 말이다. 실제로 그녀는 연관되는 작품 두어 개를 더 썼다. 심지어 <단순한 열정>을 읽고 찾아와 사랑에 빠진 연인 필립 빌랭도 책을 썼다. 이게 가능했던, 정확히는 이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에르노와 빌랭이 겪은 감정은 그들의 자아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통해 해체된 자아를 재조립하고 재건설한다. 그 결과로 다시 만들어진 자아는 이전의 것과는 다르다. 마치 성장이나 노화의 결과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 중 하나는 글쓰기가 우리 자신을 다시 쓰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우리는 글을 쓰는데, 글을 쓰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분적으로 해체하고 재건설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논리와 감성의 영역 아래로 내려가 무의식의 단계에 이르면 자아 전체가 리빌딩되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내면은 대폭 업데이트된 컴퓨터처럼 달라져 있다. 마치 레고 세트로 전혀 다른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에르노의 버전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다. 이것이야말로, 작가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일이 아닌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견뎌낼 굵고 단단한 신경줄.


에르노는 이 모든 것을 결국 '사치'라고 표현한다. 사치라는 표현은 사실 미안감의 표현이다. 사실 세상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참혹한 일들을 생각하면(그녀는 걸프전을 언급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자신은 사치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별 할 말이 없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사치를 겪지 못하는 사람은 그 러시아 외교관이다. 진정한 사치,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화장품이나 보석, 빠르게 달리는 멋진 차......만이 아닌, 진정한 내면의 사치. 누군가에 대한 사랑의 열정. 그래서일까, 영화판은 그 사치를 러시아 외교관에게도 허락한다. 두 달 가까이 연락을 끊어야 했지만 그는 겨우겨우 달려와 마지막 만남을 갖고, 러시아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토록 프랑스인과 프랑스 문화는 감정에 충실하다. 그 힘을 믿는다. 감정 그 자체의 힘과 존재를 인정하는, 한국 문화에서 허용되기 힘든 사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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