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단편소설] 그 남자와 이야기하다(3)

by 주애령

- 카이! 제발!


- 그렇게 하겠어.


내 비명이 방을 울리고 있었지만 카이의 목소리는 명료하게 들렸어.


- 그렇게 하겠어. 류를 놔줘.


마악 내 목에 이빨을 박으려던 셴이 벌떡 일어섰어.


- 진심입니까?


- 진심이야. 그러니 놔줘.


- 어떻게 믿죠?


- 이젠 약속하는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건가?


나를 붙잡은 팔들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어.

- 놔줘.


카이가 다시 말했지.

- 미쳤군요.


- 지금 놔준다면.

- 좋아요. 놔줘.


셴이 말했고 시체 같은 손들이 떨어져 나갔지. 나는 바닥을 구르다시피 하면서 문쪽으로 기어갔고 물어뜯긴 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어.


- 언젭니까?


셴이 말했어.

- 그가 떠나고 난 뒤.


- 어쨌든.


나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지.


- 셴, 그건 너도 알다시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당신은 어차피 뒷일만 맡아줄 거니 상관없습니다.


- 못 알아듣는군. 너희들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처음에 몽땅 끝장내버렸지 15년 동안 끌고 오지도 않았어.


카이는 마지막 말을 아주 빠르고 냉혹하게 뱉어냈고 젊은 뱀파이어들은 거기에 모두 상을 찡그리더군. 셴의 눈이 다시 나를 향해 빛나기 전에 카이는 날 향해 턱짓을 했어.


- 류, 마니를 데리고 갈 수 있어? 어쨌거나 떠나고 싶어 했잖아.


다들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시선만 그녀에게 모아지더군. 마니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지만 굳이 부정도 안 하고 있었고. 카이는 ‘그렇게 하겠다’ 고 외칠 때의 절박한 표정을 싹 지워버린 채 조각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 마니는 여전히 고개를 꺾고 있었고 셴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 걸터앉았지. 다른 뱀피라들도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거나 서로 기대거나 했어. 피에 굶주려 있던 그들은 그렇게 갑자기 흥분을 깨끗이 털어냈네. 난 공포를 채 떨치지 못한 다리를 가누면서 그곳을 빠져나왔어. 그러면서도 난 끝까지 카이의 얼어버린 얼굴을 떨치지 못했어. 그가 하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해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뇌세포가, 아니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으니까.


난 그날로 홍콩을 떠났네. 일단 기분을 정리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일족을 죽이는 방법이 그렇게 끔찍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걸 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했어. 그들이 카이를 죽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가 살아있기를 바랐어. 그리고 다른 뱀파이어들을 볼 때마다 도망쳐 다니곤 했어. 그들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뿐이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명멸하고 있었다. 깜박, 깜박하면서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두 반짝임은 흐린 밤에 뜬 별들을 연상케 했다. 얼굴을 마주할 준비를 한다면서 그가 불을 꺼두는 동안 이명은 말없이 두 개의 안광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고양이 눈과 비슷하게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묵직한 비올라의 선율처럼 빈 가슴속을 채우고 부드럽게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살짝 깜박일 때, 이명은 그의 감추어진 야성을 엿본 것 같아 순간 서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악마성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불을 켰고, 안광은 사라졌다.


테이프를 사놓았어.


전화했을 때 정말 놀랐어요.


내가 그런 걸 할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던 거지? 난 기계를 좋아해. 전화기도 좋아하고 팩스나 컴퓨터도 좋아하지. 팩스는 보낼 데가 없지만. 팩스 있나?


없어요. 꽤 비싸니까요. 별로 쓸데도 없고, 전자 메일을 쓰면 그런 것도 필요가 없죠.


그가 테이블 위에 테이프와 건전지를 늘어놓았고 이명은 테이프만 끼웠다.


건전지까지 살 줄은 몰랐어요. 그건 가져왔는데.... 충전기를 사용해서 많이 안 사도 되거든요.


그들은 곧 마주 앉았다. 이명은 잠시 멈칫거렸다.


왜 그래?


남은 얘기 바로 시작할까 해서요. 괜찮겠어요?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남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지?


느낌이죠. 남은 게 있다는 거. 다른 카이들은 몰라도, 그 리더는 다시 만났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는 고개를 잠시 갸우뚱했다.


금방 왔는데 숨이나 좀 돌리지.


그럼 가벼운 얘길 좀 해요.


그러지.


좋아요. 평소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죠? 일은 물론 할 수 없겠고....


사실 제일 하고 싶은 게 일이야. 건설 현장에서 자재도 날라 보고 식당에서 웨이터 노릇도 해 보고. 하지만 여기처럼 철저히 신원 보장을 요구하는 데서는 꿈도 못 꾸지. 신체적인 특징도 감추기 힘들고. 창백해서 불만 꺼도 금방 티가 나버리잖아? 정 필요하면 죽은 사람의 신분증을 사용하지만 개인 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 돼서 운신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것은 사실이야. 너라면 영원의 시간을 어디다 쓸 거지? 글을 쓸 건가?


글이요? 물론 쓰겠죠. 그리고 놀기도 많이 놀겠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하겠죠. 사람은 평생 일에 쫓기면서 살다가 겨우 죽기 10년 전쯤에야 다 망가진 몸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뜨죠. 그런 게 무슨 재미가 있어요?


류가 살며시 웃었다.


시간을 보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세는 단위에 따라 각각 다르지. 몇십 분이나 몇 시간을 금방 보내고 싶다면 음악을 듣는 게 제일 좋아. 베토벤의 합창을 다 들으면 40여분이 금방 지나가지. 핑크 플로이드 앨범 한 장만 들어도 오후는 금방 다 지나가 버려. 좀 스케일을 크게 잡는다면 비틀스를 완전히 독파하는데 일주일은 잡아야 할 거야. 싱글 박스를 포함한 레드 제플린 전집도 사오 일은 걸리지. 어제 밥 딜런 전집을 샀는데 널 만나는 시간을 고려하면 넉넉잡아 칠팔일 정도는 안고 살 생각을 하고 있어.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한 달은 보내겠군요.


음악을 듣는 대신 영화를 보면 1년은 금세 흘러가지. 그렇게 1년을 보내면 거의 내 몸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돼. 하지만 한 달이나 일 년은 영원에 비하면 너무 짧아. 최소한 몇십 년 단위로 끊으면 시간을 쓰는 제일 좋은 방법은 뭔가 배우는 거야. 완전 마스터를 전제로 한다면 서양철학사로 아마 10년 정도 쓸 수 있겠지. 그 이상은 지겨워서 할 수 없을 거야. 양자역학이나 천체물리학이라면? 20년은 충분하지 않을까? 내 뱀파이어 친구 중에 수학에 미친 녀석도 있어.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치 인간 같아.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좋아. 나도 한동안 열중해서 지금은 많이 쓰이는 언어라면 거의 다 하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 어, 중국어, 스페인어....


지적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기분이겠군요. 얼마만큼 구겨 넣을 수 있나 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거든. 얼마나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나 하는 거지 나중에 콜럼비아 마약 중개상들 만나서 스페인어를 신나게 써먹는 순간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니거든.


뱀파이어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그걸 거예요. 서로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거. 당신과 내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난 조금씩 늙어가지만 내가 죽은 후에도 당신은 지금 그대로겠죠.


정확하게는 아냐. 시간은 내 몸에 분명히 흔적을 새겨 넣고 있어. 언젠가는 분명히 내 시간은 끝날 거야. 그건 아마 죽음이 아니라 소멸이겠지.


류는 손가락 끝으로 나무 테이블을 아래층 카페에서 올라오는 음악 리듬에 맞춰 톡톡 두드렸다. 이명은 눈길을 창문으로 향했다. 어렴풋한 자동차 소음이 더운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둥근 달이 뜬 것을 보고 이명은 다시 이야기 상대에게 눈길을 돌렸다.


보름달이 뜨면 귀신들이 나온다던가.


류가 말했다.



카이들은 낮에는 잘 나다니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들은 태양도 싫었고 빛도 싫어해서 내가 처음 카이를 만났을 때 방이 그렇게 어두웠던 거지. 어쨌든 카이를 다시 만난 건 내게 기적처럼 여겨졌어. 스스로 그룹을 만들긴 했지만 자신을 제외한 전체와 싸워 이길 정도로 그가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우리가 머릿수는 적지만 세계 곳곳에서 마주치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야. 대개 뱀파이어들이 좋아하는 장소는 매한가지거든. 태평양 주변 휴양지에 가면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어.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즐기는 데다 그 틈에 쉽게 숨을 수도 있고 놀기도 좋으니까.


그때 카이는 피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어. 난 홍콩에서 나와 내내 정신없는 곳만 골라 다녔는데 마지막에서는 몸에 밴 해협 냄새를 지우려고 태평양을 찾아갔거든. 피지의 사람 드문 섬을 골라 한동안 처박히려고 했는데 우연히 마주친 거지.


만났을 때 그는 혼자였지만 동행이 있었어. 마니와 같이 있었는데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싫어해서 호텔에 처박혀 있었지. 카이는 자기가 나를 만난다면 그녀를 쓸데없이 자극할지도 모른다면서 같이 보트를 타고 나가자고 했어. 배를 타기 참 좋은 날씨였는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는 사파이어 빛으로 넘실거리고. 키는 카이가 잡고 있었는데 많이 해본 솜씨라서 선택당하기 전엔 선원이 아니었나 싶더군.


- 잘 지냈나요?


말을 건네면서도 참 어색하더군.


- 글쎄.


카이의 대답은 짧았네.


- 마니는요? 나오기 싫어하나 보죠?


- 그 애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어. 울부짖는 걸 겨우 진정시켰지. 그 앤 홍콩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되도록 이국적인 걸 많이 보여주려고 유럽에 갔어. 피렌체, 파리, 비엔나 따위를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이 무서운지 호텔 밖으로는 나오지도 않더군. 여긴 좀 좋은가 봐. 가끔씩 나와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지. 아마 곧 나을 거고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될 거야.


- 당신도 알겠지만 그건 우주 공간에 내쫓기는 거나 다를 바 없어요.


- 나도 자네도 해낸 일인데 그 애라고 못할 리 없지.


- 지금 하려면 힘들 거예요. 육체적으로 죽었을 때 정신도 같이 스러졌어야 조금이나마 고통도 덜하고 훨씬 수월할 텐데.


- 지금에 와서 어쩔 수 없지.


- 카이, 이건 당신 책임입니다. 마니를 포함해서 그냥 몽땅 풀어두거나 아니면 그들의 ‘아버지’를 죽였던 것처럼 다 죽이거나 했어야 해요.


내가 이 말을 하자 그의 얼굴이 햇빛 아래서도 창백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지.


- 이젠 날 카이라고 부르지 말게.


- 딴소리 말아요. 카이들의 아버지는 오염된 피를 준 그 망나니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에요. 이상한 괴물이 돼버려서 집도 가족도 다 잃은 그들에게 당신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줬잖아요. 드라큘라 백작이 일어나서 웃을! 카이들은, 그 셴이란 뱀피라도 다 죽었죠? 난 내내 당신네들 생각에서 도망 다니느라 미칠 지경이었어요.


- 류.


-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한 거죠? 누가 지시한 건가요? 스스로 본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걸 조절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그걸 원죄로 받아들여서 마침내 몽땅 굶주린 쥐들이 서롤 잡아먹는 식으로 끝장을 냈어야 했어요? ‘아버지’의 혈통이 그렇게 불안했나요? 마니가 지금은 조용하다지만 나중에 어떻게 폭발할지 누가 어떻게 알아요! 한번 피맛을 보면.....


- 맙소사, 제발 그만 해. 류. 넌 아무것도 몰라.


카이가 갑자기 키를 신경질적으로 비틀자 배가 갑자기 휙 기울었지. 나는 중심을 잡느라고 잠시 말을 멈췄지만 그의 참담한 표정을 보니 말을 더 할 수가 없더군.


- 네 생각대로 그들은 다 죽었어. 서로 죽을 때까지 피를 빨았어. 제비를 뽑아서 순서를 정한 다음 순번대로 나머지들에게 피를 빨려 죽었어. 자네가 떠나고 난 어두운 방 안에서 그렇게 껍질만 남은 흡혈귀 시체 십여 개가 나뒹구는 동안 마지막으로 마니는 셴의 피를 빨았지.


- 마니가 맨 마지막이었나요?


- 그래. 이미 다른 뱀피라들의 피를 마셨기 때문에 마니는 한꺼번에 셴을 죽일 수가 없었어. 빨다가 중간에 쉬고, 그동안 셴은 고통 때문에 빨리 죽으려고 몸에 상처를 내서 조금이라도 피를 더 흘리려고 했지. 난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어. 자살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마니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미 빈사상태가 된 셴을 마시고 또 마셨지. 아마 서너 시간은 걸렸을 걸. 셴이 껍질만 남은 걸 확인하고 나서 마니는 토했어.


- 그들이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당신이 하겠다는 게.....


- 그래. 최종적으로 마니를 죽이는 게 내 임무였어.


그는 거의 심드렁하게 느껴질 만큼 내뱉었지만 그 말에서 오는 충격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으려고 취하는 안간힘이란 걸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어.


- 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마니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거든. 다만 그 애가 이젠 다 받아들이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 우리 일족에게 잘 지낸다는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자네가 지내겠다는 섬이 여긴가? 좋군.

우린 보트를 댄 다음 해변으로 내려섰어. 섬 해변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뜨거운 햇빛만 내리쬐었지. 모래는 거의 진흙만큼 부드럽고 바다는 에메랄드처럼 연녹색이었어. 정말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았지.


- 류, 마니를 도와주게. 여기로 데려와도 좋고, 호텔에서 같이 지내도 좋아. 내 책임은 인정하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좋게 만들 수가 없어.


- 어떻게 도우라는 거죠?


- 그녀에겐 내가 필요 없어. 그동안 잘해주려고 노력했지만 내 존재는 그녀에게 끔찍한 과거만 되새기게 하니까. 자네가 허락만 하면 난 내 짐을 챙겨 되도록 멀리 떠나겠네.


- 자신 없습니다. 당신이 벌인 일을 뒷갈망하기도 싫고요.


나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잘라버렸지. 카이는 여전히 내 옆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난 억지로 털어 버리듯 일어서서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그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이더군. 그의 제안에 대해선 좋고 싫고를 떠나 일단 생각하기 싫었지. 그녀의 트라우마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야. 그걸 옆에서 보고 만져주고 돌봐주어 달라는 그의 제안은 말하자면 결혼과 비슷했어. 카이는 애써 그녀가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지만 보나 마나 그녀는 성냥을 바로 옆에 둔 화약이나 마찬가질 텐데 말이야. 최악의 경우 내가 직접 그녀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그걸 잘 알면서도 왜 승낙했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수 없어.


내가 의사를 표시하자마자 우리는 즉시 본토로 돌아갔지. 카이는 짐을 꾸려서 호텔 로비에 나온 마니에게 몇 마디 하지 않고 그저 안녕, 하고만 했지. 마니는 별로 대꾸가 없었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어. 나는 두 사람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는데 그가 호텔에서 나가자마자 벌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지.


내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호텔방보다는 섬에 가서 지내는 것이 더 조용하고 사람도 없으니 좋을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더군.


- 잘됐네요. 안 그래도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심했는데. 거긴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차라리 한 번쯤 직접 해보는 게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고 할 계제는 아니었네.


그녀와 나는 밤에 보트를 띄웠지. 낮에는 잠잠했지만 밤에는 꽤 바다가 거칠어서 보트가 연신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수면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보트 안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어. 섬에 도착하자 낮엔 뜨거워서 나오지 않았던 모양인지 밤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더군.


우린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지. 마니는 수영을 많이 했어. 낮이든 밤이든 멀리 헤엄쳐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올 때마다 녹초가 돼서 기어 오다시피 했어. 본토 쪽으로는 절대 가지 않고 바다 쪽으로 나갔지. 애써 악몽과 욕망을 잊으려는 것 같았지만 난 그녀 안에서 욕망이 폭발하려는 찰나를 느낄 수 있었어. 난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 그녀를 선택한 아버지 뱀파이어는 욕망과 상관없이 마구 살인을 하는 괴물이었으니 - 별 생각을 다 짜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어.


다행히 어느 날 해가 지고 나서 해변에 잠깐 나가려니까 그녀가 나가려거든 같이 나가자고 그러더군.


우린 같이 나갔지. 밤바다는 달랐어. 홍콩을 떠난 뒤로 난 바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피지에 온 다음에도 밤바다를 보는 것이 왠지 두려웠지. 하지만 홍콩의 시커먼 밤바다와 피지는 정말 달랐어. 달빛이 워낙 밝아서 수영하려고 뛰어드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으니까. 파도가 잔잔한 날에 수면 위에 가만히 떠 있으면 따스한 바닷물이 온몸을 애무하고 달빛은 서치라이트처럼 비춰 주고.


수영하러 갈 줄 알았는데 마니는 묵묵히 내 옆에 앉아 있었어.


- 류.


- 왜요?


- 카이가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말했어요?


- 아니요.


- 당신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 아니. 난 묻지도 않았고 카이도 말하지 않았어요.


난 내친김에 말을 더 하기로 했어.


- 마니, 난 당신이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확신해요. 살인을 하지 않은 이상 당신은 인간이지만 그게 영원할 수 없어요.


- 몸이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 몸도 마음도 못 견디죠.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지금 화약고나 마찬가지예요. 카이들이 그런 걸 어떻게 참았는지 난 정말 경이로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지.


- 당신을 바다에 빠뜨린 게 생각나요.


- 그때 바닷물이 참 더러웠는데.


- 그래요. 그래서 금방 씻어냈죠. 소금기며 지저분한 게 몸을 자극하니까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웠으니 뭐든 조심해야 했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어요.


- 내 존재가 당신들을 자극했나요?


- 네. 우리 중 제일 먼저 당신을 본 게 카이였어요. 그래서 그는 카이들이 당신을 잡기 전에 은밀히 경고할 참이었는데 엉뚱하게 당신이 그를 쫓아왔죠. 그래서 그는 당신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던 거예요.


- 당신도 그때 날 봤나요?


- 그때 그는 혼자 있었어요.


- 마니,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때 같이 있었거나 아니면 미행했죠? 카이는 내가 살인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당신도 그때 날 봤을 거예요.


순전히 넘겨짚은 거였지만 그녀는 뭔가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더군. 난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어.


- 내 말 들어요. 내가 죽이는 걸 보고 당신은 떠날 결심을, 아니 적어도 그만두고 싶다고 느꼈겠죠. 하지만 동료들을 떠나는 것도 힘들었을 거고. 당신은 살고 싶었을 거예요. 삶을 관 속의 쥐들처럼 끝장내긴 싫었죠? 그래서 카이가 당신을 죽이지 않았던 것도 고마워하고 있고, 그리고, 이런, 울지 말아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피눈물을 흘리는 걸 사람들이 보는 게 좋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바다로 들어가서 눈물을 닦아내다가 느닷없이 바닷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지. 난 잔잔한 물결 위로 멀어져 가는 그녀 뒷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일어섰네. 그렇게 참지 못할 바에는 카이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더군.


그날 밤 난 오랜만에 살인을 했지. 혼자 여행 온 40대 남자였어. 머리는 좀 희끗희끗했지만 몸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단단하고 매끈했지. 한적한 해변에서 습격당한 그의 피를 반쯤 빨고 나서 반듯이 눕혀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았지. 아직 숨이 완전히 끊기지 않아 헐떡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내 자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를 우리 일족으로 만들어서 그녀에게 주고 싶다는 미칠 듯이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지. 그 욕망은 너무 강해서 거의 숨이 가빠올 정도였어. 남자는 눈동자에 내 얼굴을 가득 담은 채 계속 숨을 쉬고 있었는데 공포와 쾌감이 반쯤 뒤섞인 눈동자 표면에 별빛이 번득이는 걸 볼 수 있었어. 그는 본능적으로 내가 그를 죽일까 말까 망설이는 걸 알아채고 있었지. 난 강렬한 감정에 떠밀려 무의식적으로 왼쪽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찢어냈지만 결국 그의 목 피부를 반쯤 자른 뒤 목뼈를 단번에 부러뜨렸어. 창백한 모래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동그랗게 떠진 그의 푸른 눈을 내려다봤어. 되도록 그 눈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길, 그 눈을 기억하면서 고통을 받길 원하면서.


목뼈가 부러져서 머리가 대롱대롱 매달린 그의 시체를 바다에 놓아주고 오면서 난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사람들의 경악한 표정을 보고서야 겨우 알았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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