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단편소설] 그 남자와 이야기하다(4)

by 주애령

- 오늘 누군가를 죽였군요.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보고 마니가 고개를 홱 돌렸지. 그녀도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면서.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축축한 시트 위에 누웠어.


- 시체를 바다에 버리면 떠밀려올 텐데.


난 홱 몸을 일으켰네.


- 건드리지 않았으니 걱정마요.


방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갑자기 피처럼 느껴졌네. 난 일어나 앉은 채로 굳었지. 마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몸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 한기가 닿을 정도였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방 안에 들어오자 젖은 몸이 전율을 일으켰네. 마니의 등을 보면서 나는 내 몸이 아까 즐기다 만 새 피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 이제까지 돌봐줘서 고맙지만 류, 난 당신처럼 될 수 없어요.


마니의 음성이 바람에 날리는 듯 약하게 들려왔어.

- 카이를 다시 보고 싶어요. 만나면 물어볼 게 많아요.

- 뭘 물어볼 거죠?


-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언제 피 빠는 걸 그만뒀는지도 궁금해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류. 난 목마르지도 않고 굶주리지도 않았어요. 그날 카이들이 죽어갈 때 마신 피로 심판의 날까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 그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 때문에 당신이 위험한 겁니다, 마니.


- 무슨 말이죠?


- 필요한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으면 그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차라리 살인을 하면서 살라는 겁니다. 생명이 될 수 없다면 그걸 바로 옆에서 느끼면서라도 살라는 거예요. 뱀파이어들 중엔 때때로 정신 나간 놈들이 많은데 바로 당신 같은 경우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죽을 수는 없고.


- 사람을 죽이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 그런데 죽지는 못했다? 카이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자기 정체성을 찾게 도와달라고. 정체성 같은 건 우리한테 없어요. 우리가 가진 건 단 하나,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존재할 이유예요.


마니는 무릎에 놓인 마른 손을 내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 마니, 살고 싶지 않으면 살지 않아도 돼요.



녹음기의 다 돌아간 테이프를 뒤집는 동안 창밖에 섬광이 스쳤다. 그는 잠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가 말했다.


밖에 비가 오나?


그러네요. 많이... 장마예요. 습기도 많이 찼고. 아무튼, 그래서.. 자살하는 걸 도와주었나요?


처음엔 그럴 셈이었지. 정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적어도 자살 방조죄로 잡혀 들어가 지도 않는 상황인데.

현대인들처럼 생각하시네요.


그랬지. 사실 그녀를 내 뱃속에 다 집어넣는다는 게 그땐 뭔지 잘 몰랐던 거지.


맙소사. 중간에 그만두셨군요.


그래. 그녀는 약속을 두 번 배신당한 셈이었지.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걸까? 주제넘은 거였나?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었어야 할까?

그는 한참 있다가 내뱉었다.


그냥 죽여 없앨 걸 그랬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어.


그녀를 사랑했군요.


사랑은 아니었네. 하지만 노인이 어린애를 보면서 느끼는 본능적인 애착이라면 분명 갖고 있었지. 나도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생각진 않지만, 그녀는 그야말로 알껍질도 못 깬 병아리였어. 그걸 죽여야 했어. 약속한 대로 그녀를 잡았지만 그 아이의 피가 입천장에 닿자마자 온몸이 오싹해지면서 본능적으로 ‘안 돼’ 하는 소리가 치밀었네. 카이가 손도 대지 않은 이유를 알 만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피는 피였고 나는 그걸 그대로 몸속에 밀어 넣었지. 그녀는 날 껴안지도 않고 팔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약속받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지. 죽음의 천사 역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아무리 피맛에 집중하려고 해도 입술이 서서히 덜덜 떨려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이명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어느새 혼자 회상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명의 도움 없이.



카이도 그랬을까.


나는 온 힘을 다해 내게 기댄 그녀를 밀어버렸다. 이미 힘이 빠진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벌렁 쓰러져버렸지만 아직 숨은 고르게 쉬고 있었다. 몸속에 핏기가 돌아 어지러웠지만 나는 억지로 비틀거리면서 복도에 뛰어나갔다. 아무거나, 그녀가 먹어치울 수 있는 온혈동물을 구하러. 하지만 한밤중의 모텔은 은은한 티브이 소리 외엔 잠잠했다. 절박해진 나는 아무 방이나 문을 부수고 들어가느냐 마느냐 기로에 선 순간, 담요와 타월이 가득한 서빙 카를 밀고 오던 소년이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무슨 불편한 일 있으세요?


나는 두말없이 끌고 들어와 문을 잠그고 침대에 소년을 집어던졌다. 손톱으로 목덜미의 동맥을 그은 다음 잠깐 사이에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 된 그녀 입에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젖은 시트를 들이대자 그녀는 천 뭉치를 목구멍에 밀어 넣다시피 했다. 겨우 시트를 빼앗은 다음 기술적으로 따낸 동맥의 아픔을 느끼지도 못한 채 어리벙벙해하는 소년의 머리를 버둥대는 손이 닿을 만한 반경에 밀어다놓자 그녀는 자신 안의 잽싼 본능에 따라 소년을 덮쳤다. 나는 그녀에게 밀려 침대에 떨어졌지만 그녀가 탐욕스럽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로 도망쳤다. 마니와 소년의 신음소리가 엉켜 들려오는 걸 듣지 않으려고 물로 가득 찬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은 채.


몇 시간 후 나는 시체를 치우고 나서 그녀를 피에 물든 침대에서 끌어내려 깨끗한 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에서 핏자국을 닦아냈다.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녀는 바닥에 누워 얼굴에 비치는 달빛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말 한마디도 없었다. 소년에게서 피를 다 뽑아내다 못해 살까지 먹으려 들었는데도 피부는 여전히 창백했다.


난 손목의 파란 핏줄을 손톱으로 살며시 자른 뒤 마니 입에 갖다 댔다. 그녀는 역시 본능적으로 내 손목을 부여잡고 마시기 시작했고, 몇십 초가 지나자 정수리 끝에 충격이 전해졌지만 손을 빼진 않았다.


‘이 빵은 나의 살이요, 이 포도주는 나의 피라.’ 마니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나의 포도주. 그녀는 자기 동료의 피를 지겹게 마시고도 왜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걸까. 어리석은 내 사랑. 숨이 차기 시작하자 그녀는 손목을 입에 문 채 현기증 때문에 몽롱한 내 눈빛과 마주치자 스스로 입을 떼어냈다.


- 류.


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가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더럽혔다.



이명은 그의 얼굴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명은 공포와 동정이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닦아주어야 할까. 그는 눈을 떴고, 조용히 일어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5분 후 깨끗한 얼굴로 나온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조용히 모텔을 빠져나와 근처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갔지. 거의 달이 지려고 하는 찰나에 으슥하고 그늘진 곳에 땅과 바위로 눈을 붙일 잠자리를 만들 수 있었어. 그리고 새벽이 밝을 무렵 몰래 헤엄쳐서 본토로 빠져나와야 했지. 방에 시체를 내던져 두고 왔으니 한창 난리일 테니까. 그리고 새 여권을 준비한 다음 두 번째로 먼 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올라탔네. 제일 먼 곳으로 가는 비행기는 홍콩행이었거든.


그리고 같이 지냈냐고? 모든 일을 함께 했지. 내가 마니를 죽음에서 끌어낸 만큼 살아가는 방식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유럽엔 가지 않았지. 카이와 이미 돌아다녔으니까. 그 대신 중국과 일본,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집을 빌려 거처를 마련하고 쇼핑을 했지. 그때까지 난 집도 없었어. 그냥 작게 짐을 꾸려 돌아다니면서 호텔방을 빌려 생활하는 걸 더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풀장이 딸린 집에서 밤새 헤엄치기도 하고 비디오 테이프를 천장까지 쌓아놓고 보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니스 조플린을 듣는 것을 나와 비슷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확실히 다르더군.


내가 카이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 생활은 결혼한 것과 같았어. 당연히 신혼기간은 빼고. 오래전에 결혼한 부부처럼. 그것도 남편이 끊임없이 아이 같은 아내를 돌봐야 하는. 가끔씩 먹고 난 뒤처리가 허술하다고 야단도 많이 쳤었는데. 돈이나 물건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쇼핑해온 가방을 풀지 않아 거실 한구석에는 언제나 물건이 수북이 쌓여 있었네. 사 올 때는 흥미를 느끼고 사 왔지만 막상 집에 오면 관심이 없어지는 거야. 마니가 떠나고 난 뒤 쇼핑 가방을 헤쳐보니 유행 지난 옷가지며 소니 워크맨과 시디들 틈바구니에서 새 디자인으로 세팅하려고 사온 보석이 벨벳 주머니에서 우르르 쏟아지더군. 보석들이 사파이어며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따위 광채가 강렬한 한결같이 비슷한 취향이라 마치 마니의 분신처럼 여겨졌어.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겠지? 난 마니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어느새 돈은 많지만 무관심한 남편이나 용돈만 많이 주는 아버지처럼 되어버렸던 거야. 삶의 방식과 그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고 같은 뱀파이어들을 악마가 아니라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쳤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속박해버린 게 돼버렸으니까.


어느 날 마니는 혼자 나갔네. 오전이었고, 같이 지낸 지 처음으로 혼자 밖에 나간 것이었지. 난 지갑이 있는 곳을 가르쳐준 뒤 스피커 두 개를 밖으로 끌어내 베토벤을 틀고 무작정 수영장에 알몸으로 뛰어들었지. 카이와 같이 보트를 탄 날처럼 바람이 좋고 햇빛이 무척 강한 날이었어. 더블 베이스의 둔중하고 가벼운 리듬이 맑고 뜨거운 공기 중에 퍼져나가는 걸 들으면서 태양열로 서서히 따뜻해지는 수영장 물속에서 뒹구자니 마치 불 위에 올려진 냄비 물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영하는 개구리 같은 기분이 들더군.


그럼 마니는?


아낌없이 주위에 죽음을 뿌리고 피로 생명을 잇고 하늘을 나는 이 몇백 년 묵은 뱀파이어는 이 광대한 지구 한편의 어쩔 수 없는 끓는 물속 개구리네.


하루 종일 카라얀과 베토벤과 미지근한 수영장 물에 묻혀 출렁거리면서 난 마니를 기다렸지.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워져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지. 난 그녀가 올 때까지 끈기 있게 수영장에서 내내 헤엄치면서 나오지 않았네.


새벽이 눈을 비비면서 기어올라올 무렵에 잠시 물 위에 누운 채로 잠들어 있다가 가느다란 망치로 대리석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에 벌떡 깨어났지. 마니가 돌아왔던 거야. 나는 천천히 물결을 헤치고 시선을 위로 올리자 마니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망치 소리는 그녀가 신은 하이힐 소리였네. 나갈 때는 맨발이었는데 말이야. 몸에 꽉 끼인 곡선을 살린 빨간색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도 옷 빛깔 못지않은 핏기가 돌고 있었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수영장 물이 튀긴 바닥을 걸어가면서 손에 가득 들린 쇼핑 가방 중 하나에서 입고 나간 옷을 끄집어내 수영장에 집어던졌지. 물에 뜬 채 천천히 가라앉는 티셔츠와 면 반바지에서는 길거리의 먼지로 시커멓게 더럽혀진 채로 섬유 가득히 머금고 있던 핏물이 빠져나와 수영장 물을 물들였네. 그녀는 잠시 빨갛게 변해 가는 물을 내려다보다가 익숙지 않은 하이힐을 끌고 가버렸네.


마니와 류, 연인이자 아버지와 딸인 피를 나눈 두 뱀파이어는 그렇게 47년을 같이 살았네.


그녀가 떠나고 난 뒤에도 나는 그 풀장 딸린 집에서 몇 년 동안 혼자 지냈지. 그리고 나도 집을 내버려 두고 떠났네. 다시 가방 하나만 들고 호텔 룸을 더럽히면서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흔적 -이라고 생각되는 것 - 을 발견했지만 굳이 쫓지는 않았지. 마니는 나이만 많았지 미숙한 행동으로 보면 생긴 지 얼마 안 된 뱀파이어들과 다를 바가 없었거든. 막상 마주치는 건 언제나 나를 공포 아니면 호기심으로 보는 어린것들뿐이었어. 난 막 굴러다니면서 지냈네. 시카고나 샌프란시스코 따위의 대도시들의 사람들 속에 파묻힌 채 되도록 드물게 피를 마시고 심야 포르노 극장에서 뒹굴면서 게이들이 더듬거리는 걸 구경하는 주제에 잘 때는 꼭 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기어들어가는 생활이었지.


그러던 중에 카이를 만났네.


나와 달리 카이는 자기 집이 있었네. 나도 즐기긴 했지만 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니 별로 그 답지 않게 느껴지더군. 하지만 나를 놀라게 했던 건 그늘지고 눈에 띄지 않기는 하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그의 집이 아니라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이었어. 카이는 놀랍게도 늙어 있었어. 우리가 늙다니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카이는 정말 나이를 한참 먹은 것처럼 보였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유 있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으면 확 늙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장미가 느닷없이 시드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보고 조금이라도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카이가 내게 내민 것은 큰 유리병이었어. 병 안에는 쪼그라 말라붙은 듯한 근육 덩어리가 들어 있었는데 금방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


- 뭔지 알아보겠나?


- 물기를 뺀 고기 덩어리 같은데, 이게 뭐죠?


- 마니의 심장일세.


카이가 말한 순간 내 심장도 함께 오그라드는 것 같았네.


- 내가 죽였네.


- 미쳤군요.


-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어.

- 이 괴물.


- 류, 흥분하지 말고.....


- 미쳤어! 그럴 거면 왜 내게 처음부터 맡긴 거죠? 어떻게 그럴 수....


- 내 말부터 좀 듣게. 마니는....


- 난 마니한테 날 줬어요.

- 알고 있어. 하지만....


- 알면서도? 바로 죽이나 이제 와서 죽이나 뭐가 다르지? 이 저주받을 중국 놈! 놔!


질린 표정으로 격분한 나를 바라보던 카이가 갑자기 몸을 날려 날 뒤로 붙잡았지. 난 좌우로 몸을 흔들면서 떨치려 했지만 마치 철봉으로 묶인 것 같았어. 카이는 내 등 뒤에서 이를 악물고 끝까지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네.


마침내 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그가 팔을 풀었지.


- 류, 울지 말게.


피눈물 때문에 앞이 잘 안보이더군.


- 저리 가요.


- 조금만 말하고 나서 사라져 주겠네. 자네가 그녀에게 잘 해준 건 정말 고마워. 하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된 것 같아. 마니는 자네가 떠나고 나서 이상해졌지. 너무 이상해져서 멀리 있던 내 귀에까지 소식이 들려올 정도였으니까.

- 듣기 싫다고요.


- 내가 피지에 도착했을 때 마니는 벌써 몇십 명을 죽인 상태였어. 피지 전체가 난리가 났었어. 시체는 모두 목이 찢기거나 가슴에 구멍이 나거나 머리를 박살 났었다고. 더 보고 말 것도 없었지.

- 그럴 리가 없어요. 괜찮았다고요. 내가, 내가 다 좋게 해 줬단 말이에요... 말도 안 돼.... 당신이 뭘 잘못 본 거야....


- 류, 자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자네가 한 일이 뭔가 생리적으로 극단적인 반응을 일으킨 것 같지만 자네한텐 아무 책임도 없어. 그녀도 자기가 한 짓이 뭔지 몰랐다고. 자네도 마니도 다 불쌍한 존재야.


- 그만 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지. 카이가 팔을 부축해 주려 했지만 뿌리치고 말이야. 막 문까지 걸어가려는데 발에 유리병이 차이더군. 난 병 속의 심장을, 내 피를 받아들인 그녀의 것이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 그 고깃덩어리를 한동안 응시했지. 분노가 증발하면서 다른 모든 감정까지 날아가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등 뒤에서 카이의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발길로 유리병을 걷어차 깨뜨린 뒤 희미하게 반짝이는 유리조각과 갈기갈기 흩어진 메마른 근육 조각을 밟고 방을 나가버렸어.



류?


음.


당신이 하는 얘기지만 정말 카이가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어째서지?


그녀가 정말 그렇게 사람을 마구 죽였다고 믿기지 않거든요.


실은 거길 떠나고 나서 피지에 다시 가보았지. 그의 표현처럼 죽은 사람이 있긴 있더군. 하지만 몇십 명 정도는 아니었어. 십여 명이었지. 기록에는 원인불명의 사고로 표시되어 있었고 시체 사진이 따로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정말 뱀파이어가 맨손으로 죽인 건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어. 하지만 그렇게 죽은 십여 명의 사망일자가 모두 일주일 안팎이어서 뱀파이어 쪽에 혐의를 둘 만도 했어. 정말 정신 나간 뱀파이어가 그랬거나 선택된 지 얼마 안 되는 젊고 난폭한 뱀파이어 두세 명이 잠깐 놀러 가서 저질렀을지도 모르지.


그녀가 그랬을 가능성도 인정하는군요.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만 인정하지.

그러면 카이를 다시 만났나요?


피지에서 단 한번 멀찍이 봤지. 날 찾으러 온 것 같았지만 그냥 숨어버렸지. 그가 정말 죽였건 내게 거짓말을 했건 이제 마니를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거짓말을 한 거라면 마니는 내가 그걸 믿기 바랐을 테니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러면 이제 그의 말을 믿는 건가요?


그래. 진실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아. 다시 올 건가?


이명이 미소 지었다.


우선 정리부터 하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그대로 모두 옮겨 쓰고 나서, 내 이야기로 만들어야죠.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왜,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진 않아도 세월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쩌면 내 생의 최후의 작품으로 남길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당신은 그걸 볼 수 있겠죠?


날 죽이려는 뱀파이어가 없다면야.


잘됐군요. 그리고 심심하면 전화해요. 놀러 갈 테니.


고맙군.


원고 다 쓰면 가져올게요.


그래 주면 고맙네. 천천히 쓰라고. 그리고 생수통 다 가져가게. 내겐 필요 없으니까.


이명은 계단을 내려갔다. 가방에는 녹음기와 테이프, 류가 준 생수통이 들어 있었다. 곧 새벽이라 그는 나선 계단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른한 피로가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지만 이명의 머릿속에는 다시 그에게 돌아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제까지 그의 집을 드나들면서 하면서 하루도 빼지 않고 본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 창문이 내려다보는 차가운 거리를 지나쳐 뒷문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의 지친 이야기를 테이프에 담고 새벽 거리를 빠져나가거나, 이야기 중에 잠시 쉴 때 창문을 기웃거리던 희미한 연기 비슷한 가냘픈 시선의 주인을 그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는 대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이야기는 닫혔고 이제 그는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은 테이프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 것에 대해 잠시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다. 씨실의 주인이 입을 연 이상 반드시 날실의 주인도 그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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