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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Jul 04. 2021

[판타지 단편동화] 나랑 바꿀래(1)

살이 익어가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병진이는 책상 앞에 앉아 수학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여백에 또렷한 글씨로 <효도수학>이라고 적힌 학습지는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옆에는 엄마가 조그마한 책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효도수학>은 너무 어려웠다. 병진이는 수학 문제를 푸는 대신 학습지 여백에 가위표를 층층이 쳤다. 가위표를 아무리 그려도 머릿속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가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소리만 더운 방 안에 울렸다.

“엄마.”

“왜.”

“에어컨 안 켜?”

“안 돼. 요금 나와.”

십 년 만에 가장 덥다는 여름. 이 날씨에 엄마는 요금 나온다고 에어컨도 안 켠다. 그럴 거면 학습지도 풀지 말라고 하든가. 방학이지만 병진이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아홉 시부터 자리에 앉아 학습지를 풀고 있다. 벌써 열두 시가 가까워온다. 중학교 과정을 준비해준다는 <효도수학>은 이번 여름방학부터 시작했다. 한쪽에 열 개가 넘는 문제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한 장을 넘기려면 스무 개가 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일찍 퇴근한 아빠는 학습지를 슬쩍 넘겨다보더니 “어이쿠, 우리 회사 회계 장부인 줄 알았다.”하고 병진이의 머리를 툭 쳤다. 김치를 썰던 엄마가 말했다.

“병진이가 수학이 약해서 학원 선생님한테 추천받은 거야.”

“그래? 이거 풀면 일등 한대?”

“그것만 해서 일등 되겠어? 다른 것도 해야지.”

엄마는 손에 잡은 식칼에 힘을 주고 김치 끄트머리를 꽉 눌렀다. 병진이는 우두둑하고 썰리는 김치를 보자 왠지 자기 몸 어딘가가 잘리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올해는 피서를 안 갔다. 엄마는 작년에 계곡에 놀러 갈 짐을 싸면서 내년부터 중학교 준비를 해야 하니 피서는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병진이는 계곡물에 발만 담그고 하루 종일 죽은 물고기처럼 앉아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서 냇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다. 올해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엄마는 부족한 수학을 보충해야 한다며 처음 보는 학습지 <효도수학>을 내밀었다. 

“이거 풀고 지금 다니는 학원 박 선생님한테 지도받도록 해. 엄마가 과외 해달라고 빌고 빌어서 겨우 받아 왔어. 열심히 해.”

<효도수학>을 편 병진이는 하얀 건 종이, 까만 건 잉크라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매주  월, 수, 금은 학원에, 화, 목, 토는 태권도장에 가야 했다. 일요일은 영어 회화 학원이었다. 남는 시간은 집에 붙어 앉아 <효도수학>을 풀어야 했다. 엄마는 이번 방학에 반드시 수학을 잡아야 한다며 과외를 시작하고 싶어 했지만 학원장 박 선생님이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받아온 <효도수학>은 정말 어려웠다. 한 시간에 두 문제 풀기도 어려웠다. 학원에서 수업받는 시간보다 <효도수학>과 끙끙대는 시간이 더 길었다.

지금도 지겨운 <효도수학>을 풀고 있다. 학원과 태권도장을 다녀오면 집에 있는 시간은 온통 이 <효도수학>에 달라붙어 보내야 했다. 요즘은 날씨가 너무 더운 나머지 아예 머리가 뜨끈뜨끈하다. 하지만 지난달에 전기요금이 이십만 원이나 나왔다며 엄마는 에어컨 리모컨을 아예 없애버렸다. 병진이는 샤프 끝을 깨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점심밥 먹는 시간이다.

드디어 엄마가 스마트폰을 놓고 일어섰다. 병진이도 샤프를 놓았다. 엄마는 겨우 두 문제 푼 학습지를 힐끗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열두 시 반이었다.

"나와서 밥 먹어."

엄마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배고팠던 병진이는 신이 났다. 점심을 먹으러 부엌으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앨리스가 병진이를 향해 뛰어왔다. 앨리스는 두 살 난 비글 강아지다. 하얀색과 갈색의 통통한 몸을 흔들며 달릴 때마다 넓적한 귀가 팔랑거렸다. 엄마는 냄새나서 싫다면서도 앨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진이는 아침마다 앨리스와 조깅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앨리스를 사 오기 전에는 조깅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앨리스가 배 위에 기어올라 코를 핥으며 짖어대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병진이는 앨리스를 덥석 껴안았다.

“밥 먹고 놀아야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던 엄마가 말했다.

“밥 먹고 나면 앨리스랑 잠깐 나가 놀아도 돼?”

“바깥은 더워.”

“더워도 괜찮아. 잠깐만 놀고 올게. 땀 좀 흘리면 기분도 좋고 공부도 잘 될 것 같아. 응?”

병진이는 식탁 끝에 매달렸다. 엄마는 곁눈으로 병진이와 앨리스를 슬쩍 흘겨보더니 허락을 내렸다. 

“더우니까 삼십 분만 놀다 와.”

“오케이!”

병진이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식탁 앞에 앉았다.

밥을 먹고 난 병진이는 앨리스를 리드줄로 묶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산책을 하게 된 앨리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날씨는 더웠지만 병진이는 좋기만 했다.

“앨리스, 너도 답답했지? 달리자!”

공원으로 간 병진이와 앨리스는 나란히 달렸다. 금방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래도 앨리스는 더 달리고 싶어 했다. 병진이는 앨리스의 리드줄을 잠깐 풀어주었다. 귀를 부채처럼 흔들며 달려간 앨리스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밭에 뛰어들더니 냉큼 뒹굴었다. 이 모습을 본 병진이는 중얼거렸다.

“앨리스 넌 좋겠다...”

병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앨리스는 신나게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병진이도 달리고 싶었지만 날씨가 푹푹 쪘다. 병진이는 앨리스와 같이 달리는 대신 그늘진 벤치를 찾아 걸터앉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팬티가 젖을 정도로 땀이 퐁퐁 솟았다. 병진이는 콜라 캔이라도 들고 나올 걸 후회하면서 건너편 풀밭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제법 드나드는 공원이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손수레를 밀고 다니는 요구르트 아줌마도 산책하는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스케치북과 물감통을 들고 가끔 그림을 그리러 오는 학생이나 큼직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어대는 아저씨도 뜨거운 날씨에 질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매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공원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공원은 뜨거운 태양빛 아래 나른하게 달아올랐다. 병진이는 졸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병진아."

누군가 병진이의 이름을 불렀다. 병진이는 깜박거리며 땀이 흘러내리는 눈가를 닦았다.

"응? 누구야?"

“나야."

병진이는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옆에 앨리스가 올라앉아 있었다. 병진이는 손가락을 들어 귓구멍을 후벼냈다. 뭔가 잘못 들었겠지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 앨리스 말고 아무도 없었다.

"병진아."

다시 누군가 병진이의 이름을 불렀다. 병진이는 일어서서 벤치 뒤를 찾아보고, 길 건너편으로 목을 뽑아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앨리스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병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병진이는 슬쩍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앨리스, 혹시 너야?"

앨리스는 천천히 머리를 아래 위로 움직였다. 그것이 끄덕이는 고갯짓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앨리스, 너 사람처럼 말할 줄 아는 거야?”

앨리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마치 영어 회화 학원의 외국인 선생님이 자주 하는 어깻짓 같았다. 그러더니 앨리스의 입이 미묘하게 움직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할 줄 알지. 사람 말이 뭐가 어렵다고 그리 신기해하는 거야?"

병진이는 입을 딱 벌렸다.

"앨리스?"

"뭘 그렇게 놀래? 사람 말은 아주 쉬워. 못하는 체하고 있을 뿐이지."

“뭐? 그러면, 너 이제까지 사람 말을 할 줄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는 거야?”

“사람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앨리스는 다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여긴 지금 아무도 없어.”

“어, 앨리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네가 사람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몰랐어. 정말 몰랐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오늘 내가, 너무 날씨가 더워서 제정신이 아닌 거야. 그렇지?”

병진이가 도리질을 치자 땀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목욕을 마친 강아지가 물기를 터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 사람 말을 할 줄 안다면 이제까지 왜 가만히 있었어? 나랑 가끔 둘이서만 얘기하면 재미있잖아.”

“재미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난 너보다 훨씬 말을 잘한다고. 국어 시험을 봐도 너보다 점수를 잘 받을 걸.”

“뭐? 강아지 주제에. 네가 나보다 말을 잘한다고?”

앨리스는 그 말에 흥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그 순간 병진이는 앨리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씩 비웃음을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끼어들 필요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널 볼 때마다 안타까운 걸. 저렇게 쉬운 문제를 왜 틀릴까 하고.”

“앨리스,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그렇게 쉽게 말할 거면 네가 한 번 시험 쳐보든가. 아니면 네가 답을 가르쳐주든가. 엄마랑 똑같은 말을 하네. 엄마는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쉽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는데 그럼 직접 공부를 해보든가...”

병진이는 툴툴거렸다. 앨리스는 병진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진아,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으면 나랑 바꾸는 게 어때?

“뭐?”

“너 공부하기 싫지? 학원 가기도 싫지? 태권도장도 싫고. 학습지도 힘들잖아. 나랑 바꾸자.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서 사는 거야.”

“뭐라고? 그럼 네가 사람이 돼서, 학교도 가고 공부도 하고, 난, 난 강아지가 돼서 하루 종일 놀고먹고, 그러자고?”

“그래.”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루 종일 네 곁에 있으니까 알 수 있어. 네가 얼마나 죽을 맛인지. 학원도 학교도 지겨운데 학습지까지 매일 하려니 너무너무 싫지? 매일같이 엄마는 짜증만 내고. 네가 날 끌어안고 몇 번이나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나, 그 말 잊지 않았어. 네 소원을 들어줄게. 나랑 바꾸자. 그럼 나처럼 살 수 있어.”

병진이는 가슴이 떨렸다. 앨리스처럼 하루 종일 뒹굴면서 먹고 놀 수만 있다면. 으, 지긋지긋한 <효도수학>만 집어치워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앨리스의 말이 진짤까? 정말 바꿀 수 있는 걸까? 병진이는 앨리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병진이를 바라보는 앨리스의 눈빛은 마치 얼마 전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장수 같았다. 요놈아, 너 이거 갖고 싶지? 하면서 노란 병아리를 내밀던 병아리 장수의 눈빛과 똑같았다. 병진이는 그 병아리가 죽고 싶도록 갖고 싶었다. 앨리스의 눈빛은 그때처럼 병진이를 몸 달게 했다.

이십 분 후 병진이는 앨리스가 이끄는 리드줄에 묶여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병진이의 모습으로 변한 앨리스는 일단 개가 된 병진이를 리드줄에서 풀어준 다음 엄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샤워를 한 앨리스는 의젓하게 책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까지 학습지 <효도수학>을 풀었다. 아빠는 그날도 퇴근이 늦었다. 엄마와 단 둘이 저녁을 먹고 난 앨리스는 거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시키지도 않은 인터넷 강의를 보았다. 엄마는 옆에서 드라마를 틀었지만 앨리스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인터넷 강의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앨리스가 사람 노릇을 하는 동안 병진이는 강아지로 변한 자기의 몸에 한껏 놀라고 있었다. 털 때문인지 온몸이 간질간질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그만 먼지 구름이 계속 따라다니는 기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병진이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이렇게 수많은 종류의 냄새를 한꺼번에 맡아보기 처음이었다. 김치 냄새와 고기 냄새, 방금 씻은 야채와 과일 냄새는 물론 변기와 비누가 풍기는 냄새에 물론 엄마가 아침에 바른 화장품 냄새까지 수천 가지 냄새가 콧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냄새만으로 먹을 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엄마가 어느 찬장에 햄을 숨겨 두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심지어 집중하면 벽에 발린 시멘트의 아릿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냄새만이 아니었다, 병진이는 반려동물용 신발을 벗자마자 집안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사방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앨리스, 우리 집이 이렇게 시끄러웠어? 사방에서 소리가 계속 들려.”

“벌레 소리야.”

“뭐? 우리 집에 이렇게 벌레가 많아? 그렇게 더러워?”

“조용히 해.”

앨리스는 발로 슬쩍 병진이를 밀었다. 병진이는 깜짝 놀랐다. 병진이가 사람이었을 때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살짝 밀기만 했지만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병진이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스락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의식하기도 전에 발이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소파 밑에 살찐 바퀴벌레가 기어가고 있었다. 휴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자신도 모르게 앞발로 바퀴벌레를 짓밟고 있었다. 병진이는 혐오감과 벌레를 사냥한 기쁨이 뒤섞인 해괴한 기분을 맛보았다. 소파 밑에서 기어 나온 병진이를 보고 앨리스가 소리쳤다.

“엄마, 앨리스가 바퀴벌레 잡았어요!”

“바퀴벌레? 우리 집에 바퀴가 있어?”

누워 있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서 두루마리 휴지를 움켜쥐었다.

“앨리스, 당장 이리 와! 아유 더러워!”

“야단치지 마세요. 벌레 잡았잖아요. 칭찬해주세요.”

앨리스의 말에 엄마가 휴지로 병진이의 발을 박박 닦다 말고 싱긋 웃었다. 

“그런가? 병진이가 아주 어른스럽네.”

밤이 되자 앨리스는 복습을 하고 발을 씻고 이를 닦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병진이는 안방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 엄마가 주는 간식을 받아먹었다. 팔다리가 슬슬 녹아내리는 듯 편안했다. 

‘우와, 좋다. 강아지가 되니까 정말 편하잖아. 학원 안 가도 되고 태권도장도 안 가도 돼. 하루 종일 놀다가 배고프면 누워서 밥만 먹으면 돼. 엄마가 가끔 쓰다듬어 주는데 그것도 정말 좋아.’

생각해 보니 엄마와 같이 웃으면서 논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솔직히 엄마가 소파에 누운 병진이를 쓰다듬어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병진이는 엄마 손에 코를 비볐다. 고무장갑과 핸드크림 냄새가 뒤섞여 났다.

‘헤헤. 너무 좋다.’

병진이는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앨리스는 병진이를 리드줄에 묶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공원에는 몸을 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앨리스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린 뒤 벤치에 앉아 오 분간 쉬고 나서 다시 집으로 달려서 돌아갔다. 마치 기계 같았다. 병진이도 실컷 달렸다. 땀을 잔뜩 흘렸지만 씻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좋았다.

병진이가 시원한 마룻바닥에 누워 쿨쿨 자는 동안 앨리스는 학원에 갔다. 학원 수업은 오후 열 시에 끝나기로 되어 있었다. 집에만 있다 보니 병진이는 조금 심심했지만 학원에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슬슬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한잠 늘어지게 자기로 했다. 에이, 앨리스랑 바꾸기 전에 털 깎아 달랠걸. 덥잖아. 병진이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오후 일곱 시였다. 초인종 소리가 났다. 아빠였다. 병진이는 고개를 벌떡 들었다. 엄마도 방에서 나왔다.

“왔네.”

“병진인, 학원?”

“어.”

아빠는 화장실로, 엄마는 안방으로 가버렸다.

병진이는 소파에 엎드려 기다렸지만 엄마도 아빠도 거실로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빠가 나왔다. 병진이는 아빠가 반가워서 바닥으로 뛰어내려 아빠의 바짓부리에 달라붙었다.

“헤헤, 아빠! 아빠!”

아빠는 병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병진이의 등을 냉큼 잡아 옆구리에 끼고 베란다로 나갔다.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어? 아빠? 담배 끊었잖아?”

병진이는 버둥거리면서 말했지만 컹컹, 짖는 소리만 나왔다. 아빠는 베란다 유리문을 꼭 닫더니 대뜸 병진이의 머리를 주먹으로 콱 쥐어박았다.

“조용히 해, 이 개새끼야!”

으악, 병진이는 깨갱거렸다. 아픈 것도 아팠지만 아빠가 욕을 하는 걸 처음 들어서 놀라웠다. 아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씨팔년, 담배 하나 집안에서 맘대로 못 피우고 더러워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자고 돈을 벌면 뭘 해. 별 쓰레기 같은 학원이나 학습지에 다 퍼붓고. 애새끼도 엄말 닮아 공부 더럽게 못하고. 말도 안 듣고. 가끔 진짜 내 자식 맞나 싶고... 아이 씨발, 담배 말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진짜. 내 인생.”

병진이는 아빠 옆구리에 끼인 채 발발 떨었다. 아빠의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다. 너무 무서웠다.

“야, 이 개새끼야, 떨긴 왜 떨어! 내가 무서워? 너도 나 무시하냐?”

아빠는 병진이를 다시 한번 쥐어박았다. 비명을 질렀지만 대신 낑낑대는 소리만 나왔다. 아빠는 병진이의 머리와 엉덩이, 배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바닥에 집어던졌다. 병진이는 좁은 베란다에서 이리저리 도망쳤지만 아빠의 발길질을 피할 수 없었다. 발길질을 하던 아빠는 병진이를 콱콱 짓밟기까지 했다. 병진이는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쌌다.

“아 이 개새끼 왜 이렇게 피해? 한두 번 맞아보는 것도 아니고... 씨발 오줌 쌌네.”

아빠는 병진이를 베란다에 내버려 두고 거실로 들어갔다. 병진이는 맞은 자리가 너무 아파 눈물이 나왔다. 아빠에게 얻어맞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빠가 이렇게 무섭고 잔인한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서움과 아픔이 뒤섞였다.

“아빠, 진짜 나쁜 사람이야? 나 없을 때 이렇게 앨리스 때렸던 거야?”

병진이는 눈물을 핥다가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리고 앨리스가 들어왔다. 엄마가 안방에서 나왔다.

“병진아, 이제 왔니?”

“네.”

아빠도 방에서 나왔다.

“힘들지? 우리 병진이.”

“괜찮아요.”

“앨리스가 너 찾느라 낑낑대서 잠깐 베란다에 놔뒀단다. 네가 안고 들어가렴.”

병진이는 앨리스의 품에 안겨 방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잤다. 다음날 아침 앨리스는 병진이를 깨워 산책을 나갔다. 병진이는 아픈 몸을 끌고 일어나야 했다.

“앨리스, 너도 아빠한테 맞았니?”

병진이는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날 앨리스는 태권도장에 갔다. 병진이는 아빠한테 얻어맞은 데가 너무 아파서 하루 종일 소파 밑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저녁이 되자 아빠가 들어왔다. 병진이는 살며시 기어나갔다. 엄마는 마트에 가고 없었다. 아빠는 주변을 슬며시 돌아보더니 병진이의 배를 냅다 걷어찼다. 병진이는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도 비슷한 하루가 이어졌다.

병진이는 아빠에게 거의 매일 매를 맞았다. 엄마나 앨리스가 옆에 있으면 아빠가 때리지 않았지만 아빠와 단 둘이 있으면 여지없이 손발이 날아왔다. 병진이는 되도록 엄마와 앨리스 옆에 달라붙었지만 아빠의 매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매질을 피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한 번 잡히면 밀려 있던 매질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병진이는 괴로웠다.

“앨리스랑 바꾸니까 공부 안 하고 학원 안 가서 편한데... 아빠만 날 때리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병진이는 고민했다. 다시 사람이 되면 학원과 태권도장을 돌아야 한다. 지겨운 <효도수학>도 풀어야 한다. 하지만 아빠의 매질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마룻바닥과 소파를 신나게 뛰어다니던 병진이는 아빠가 집에 오기만 하면 먼지와 죽은 벌레가 가득한 소파나 침대 밑에 들어가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엎드려 있어야 했다.

어느 날 밤 새벽 두 시나 됐을까, 술에 잔뜩 취한 아빠가 들어왔다. 엄마도 앨리스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식탁 밑에서 자고 있던 병진이는 현관문을 비틀어 여는 소리에 놀라 본능적으로 뛰쳐나왔다.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 아빠는 뒤돌아 도망치는 병진이의 꼬리를 확 잡아당기더니 거꾸로 들어 올렸다.

“니미 씨팔... 죽도록 일하다 들어오니 마누라도 애새끼도 퍼져 자고 있네... 맞아주는 건 개새끼밖에 없구먼. 그래 너라도 같이 자자.”

아빠는 병진이를 옆구리에 끼고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병진이는 아빠에게 짓눌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넥타이에 고추장이 얼룩졌다. 병진이는 혀를 내밀어 핥았다. 짜고 매웠다.

“이 시키, 어딜 핥어? 그래 핥아라 핥아...”

아빠의 몸에서 담배 냄새와 술 냄새, 바깥에서 묻혀 온 매캐한 매연 냄새가 뒤섞여 났다. 코가 맹맹하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병진이는 몸부림을 쳤다. 숨이 막히고 눈이 따가워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이었을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느낌이었다. 더 이상 안겨 있다가는 토할 것 같았다. 도대체 아빠는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일까?

“이 시키, 같이 자자니까 왜 몸부림을 쳐? 너도 나 무시하냐? 너 일루 와. 오랜만에 좀 맞아보자.”

아빠는 병진이의 뒷덜미를 잡고 베란다로 나갔다. 병진이는 몸부림을 쳤다. 아빠, 살려 줘! 병진이는 어쩔 수 없이 온 힘을 다해 아빠의 손목을 칵 물었다. 깜짝 놀란 아빠는 병진이를 베란다 바닥에 내던졌다. 병진이는 캑하고 나자빠졌다.

“이놈 사람을 물어? 오늘 아주 죽었어.”

아빠는 와이셔츠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병진은 바들바들 떨었다. 아빠가 담뱃불을 병진이에게 가까이 가져오더니 눈알에 들이댔다. 시뻘건 담뱃불이 다가왔다. 병진이는 눈을 꽉 감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큰 소리를 질러댔다. 캬아앙! 소리는 찢어지는 듯한 개 짖는 소리로 튀어나왔다. 방문을 열고 엄마, 아니 앨리스가 튀어나왔다. 소리에 움찔한 아빠가 돌아보았다.

앨리스가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아빠.”

베란다로 온 앨리스는 병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병진이는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앨리스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병진이는 안심하면서도 순간 아빠보다 앨리스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을 껐다. 병진이는 앨리스의 팔을 비집고 빠져나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이곳에서 영원히 나가고 싶지 않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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