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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령 Jul 04. 2021

[판타지 단편동화] 나랑 바꿀래(2)

“앨리스, 이젠 안 돼! 나 다시 돌아갈래!”

“말 걸지 마. 나 지금 <효도수학> 하느라 바빠.”

“무슨 소리야! 그건 원래 내 거잖아! 앨리스, 우리 다시 바꾸자. 이젠 못 견디겠어.”

병진이는 뒷발에 힘을 주고 앨리스의 무릎에 펄쩍 뛰어올랐다. 앨리스는 별 수 없이 병진이와 마주 앉았다. 방 안에는 둘밖에 없었다. 요즘 엄마는 병진이를 옆에서 감시하지 않았다. 놔두어도 혼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앨리스에게 대만족이었다. 오늘 엄마는 오랜만에 백화점으로 외출 중이었다.

“다시 바꾸자고?”

“응.”

“왜?"

"그걸 몰라서 물어? 나 아빠한테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있잖아. 지난번엔 담뱃불로 지지려고 했다고. 네가 구해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는 못 살겠어."

앨리스는 피식 웃었다.

"맞고 좀 살면 어때?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으면서 학원에서 썩는 것보단 낫잖아. 태권도장 사범도 가끔 엉덩이에 발길질을 하던데. 너네 엄마는 도대체 얼마를 주고 이 쓰레기를 샀니? 이런 걸 하루 종일 들여다보느니 개로 사는 게 훨씬 낫잖아.”

앨리스는 <효도수학>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래도 더 이상 매는 못 맞겠어.”

“아휴, 이래서야 원, 요즘 애들은 약해 빠졌다니까.  이제 한 달도 안 됐잖아. 세상에 신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어?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맷집 붙으면 견딜 만해. 맞다 보면 요령이 생기거든. 손이 닿기 전에 몸을 살짝 비틀어서 덜 아픈 데로 맞는다거나...”

“앨리스, 내 말은 그 말이 아냐. 우리 아빤 너한테는 그냥 남이지만 나한테는 진짜 아빠야. 공부 못 하고 놀기만 한다고 학교나 학원에서 맞는 건 괜찮아. 남이 때리는 거니까. 하지만 아빠한테 맞는 건 말이지, 정말 힘들다고. 그냥 맞는 게 아냐.”

“그냥 맞는 게 아니면, 뭐야?”

“몰라, 그냥 학교에서 맞는 거보다 힘들다는 얘기야. 뭐랄까, 선생에게 맞아도 좀 지나면 안 아파. 하지만 아빠한테 맞으면...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 자리가 쑥쑥 아파. 기분도 정말 나쁘고 한참 동안 우울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아빠한테 매 맞은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 앨리스, 내 아빠는 왜 날 때리는 걸까? 혹시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잘못한 게 없어도 그냥 때려주고 싶은 걸까?”

앨리스는 고개를 돌린 채 병진이의 말을 들었다.

“너도 날 때린 적이 있잖아.”

“그래. 나도 장난 삼아 널 때린 적이 있어. 정말 미안해. 이젠 사람이 되면 그 어떤 강아지도, 아니 어떤 동물도 때리지 않을 거야. 아, 사람도 때리지 않을 거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나 좀 살려줘. 앨리스.”

앨리스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더니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면야."

병진이는 이 말을 듣자 너무 기뻐 펄쩍 뛰었다.

"정말?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예전처럼 바꿔주는 건 곤란해.”

“뭐야, 그럼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거야?”

“꼭 그렇지는 않아. 다시 바꿀 방법이 있기는 해. 하지만 예전처럼은 안 돼."

“예전과 똑같이는 안 된다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앨리스는 샤프 끝으로 머리를 긁었다.

“다른 가족들 중 한 명을 골라 바꾸어야 돼."

“뭐라고?”

“네가 엄마나 아빠 둘 중 하나를 골라 바꿔야만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어. 네가 사람으로 돌아오는 대신 엄마나 아빠는 지금의 네 모습이 되는 거야. 둘 중 누구를 개로 만들지는 네가 정해. 너희 가족은 엄마, 아빠, 너밖에 없잖아. 그러니 선택은 간단해. 엄마가 싫어, 아빠가 싫어?”

병진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 중 한 사람을 없애야만 하다니.

“결정하기 힘든데.”

“왜?”

“엄마든 아빠든 둘 다 있어야 돼. 엄마가 없으면 밥은 누가 해 주지? 청소도 해야 하잖아. 그리고 아빠는 돈을 벌어오잖아.”

“네가 사람으로 돌아오려면 둘 중 하나는 강아지로 바꿔야 해. 선택하면 둘 중 하나는 없어질 거야. 잘 생각해 봐. 누가 없어지는 게 좋아?”

병진이는 생각에 잠겼다.

“어, 엄마로 할게. 엄마는 밥을 해주지만, 밥은 마트에 가서 사 올 수 있으니까. 청소는 어떻게든 하면 되고. 하지만 아빠는 못 바꿔. 아빠가 돈을 벌어오니까. 아빠가 없어지면 돈은 누가 벌어? 돈 버는 건 어렵단 말이야.”

“그럼 엄마로 바꾸기로 결정했어?”

“으... 응. 그런데, 엄마가 강아지가 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걱정 마.”

앨리스는 눈을 찡긋했다.

“난 해방될 거야. 네 눈앞에서 사라질 거야. 넌 네 아빠한테 얻어맞을 엄마나 걱정해.”

병진이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 꼬리를 흔드는 비글 강아지가 앉아 있었다. 몸이 개운했다. 마치 들판에 누워 산들바람을 쐬며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병진이가 팔을 뻗자 강아지가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아, 엄마.”

병진이는 강아지가 된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거실에는 엄마가 외출하면서 들고나간 핸드백이 놓여 있었다.


엄마가 없어지자 아빠는 자주 집에 늦었다. 어떤 때에는 집에 전화만 걸고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우리 병진이, 이제 다 커서 집에 혼자 있어도 되지? 그럼 아빠는 아들만 믿고 열심히 일한다~”

병진이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왜냐하면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엄마가 늘 옆에 있었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따뜻한 강아지가 되어 곁에 있었다. 강아지가 된 엄마는 한결같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조깅을 하자고 조르고, 집안일을 하는 병진이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따라다녔다. 병진이가 공부를 게을리한다 싶으면 문제집을 물고 와서 앞에 떨어뜨렸다.

가끔 할머니가 집에 오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 오셔서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보다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병진이는 남기지 않고 먹었다. 종합반 학원과 태권도장은 계속 다녔지만 지긋지긋한 <효도수학>은 갖다 버렸다.

병진이는 아빠가 강아지가 된 엄마를 때릴까 봐 주의를 기울였다. 아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병진이는 엄마를 매일 밤 끌어안고 잤다. 하지만 병진이가 학원에서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어쩔 수 없었다. 아빠가 없을 때 병진이는 엄마를 껴안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엄마는 담배 냄새를 풍기며 낑낑거렸다. 때로는 다리를 절룩이기도 하고 꼭 끌어안으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병진이는 눈물이 났다. 엄마가 아빠한테 얻어맞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만 안 때리면 좋을 텐데. 그럼 최골 텐데. 진짜로.”

병진이는 아빠가 개를 학대하는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왜 아빠는 힘없는 동물을 두들겨 패는 걸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점점 엄마가 고통에 차서 낑낑대는 소리를 낼 때가 많아졌다. 병진이는 엄마와 지내는 시간을 되도록 늘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빠의 매질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병진이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병진이는 마음이 아팠다. 엄마를 사람으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면 학습지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

학원을 더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병진이는 겁이 더럭 났다. 걱정에 싸인 병진이는 여름 방학이 끝나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학원에서는 중학교 과정을 준비하는 마지막 특강을 시작했다. 학원이 늦게 끝나는 날이 많아졌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병진이는 집에 들러 엄마에게 밥을 주고, 할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갔다. 아빠도 바빠지는 모양인지 점점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아지면서 하루 종일 엄마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다. 병진이는 생각했다.

‘차라리 다행이야.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면 엄마가 맞을 일이 없으니까. 내가 옆에서 지켜주진 못하지만 내가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할 테니 엄마는 안심할 거야. 주말에는 내가 집에 있으니 아빠가 엄마를 때리지는 못하겠지.’

병진이는 매일 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기어 나오는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병진이는 평소보다 학원에서 늦게 돌아왔다. 모의고사 준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초인종 대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온 병진이는 현관에 놓인 아빠의 구두를 발견했다. 거실로 들어가자 불 켜진 베란다에서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한 손으로 엄마의 목을 잡아서 허공에 흔들어대고 있었다. 숨이 막힌 엄마는 눈알이 불거진 채 네 발을 허우적거렸다. 엄마의 한쪽 눈알과 마주치는 순간 병진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빠는 엄마를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내던졌다.

병진이는 방으로 도망쳤다. 더 이상 엄마를 보호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한참 궁리한 끝에 병진이는 공원에서 앨리스를 찾아보기로 했다. 앨리스가 처음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한 장소가 공원이기 때문이었다. 병진이는 아빠가 늦게 들어오는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아빠가 늦게 들어오니 먼저 자라는 전화를 한 날, 병진이는 혼자 공원으로 가서 앨리스와 처음 말을 나눴던 벤치를 찾아 앉았다. 밤 아홉 시 반이었다. 늦여름의 열기가 아직 밤공기에 남아 있었다. 

“앨리스, 앨리스, 어디 있어?”

병진이는 앨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나직한 목소리가 공원에 멀리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치즈색 고양이 한 마리가 거기서 뭐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흘끔 돌아보더니 회양목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앨리스, 앨리스, 나타나 줘. 엄마가 맞아 죽을지도 몰라.”

밤공기는 서서히 차가워졌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윽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들리던 고양이 울음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았다. 춥고 무서워졌다. 바람을 맞은 사철나무 가지가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별 한 점 없는 검은 하늘이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움을 참고 한 시간 정도 기다려 보았지만 앨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병진이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열자마자 병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침대에는 똑같이 생긴 강아지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엄마의 목에 목걸이가 둘러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병진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목걸이를 걸지 않은 강아지, 바로 앨리스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다니니? 밥은 먹었어?”

엄마가 뒷발을 들어 코끝을 긁어댔다. 날리는 털에 앨리스가 찡그리더니 말했다.

“나를 왜 찾아다녔는지 알고 있어.”

병진이는 겨우 침대로 다가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듯한 눈치였다. 둘의 모습은 똑같았지만 앨리스는 강아지의 탈을 쓴 귀신같았다.

“이 바보야, 네 아빠가 개만 보면 발길질부터 해대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목까지 조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바보야, 그렇게 때리는 사람이 목을 못 조르겠어?”

병진이는 한숨을 쉬었다.

“앨리스, 난 몰랐어. 아빠가 그 정도로 엄마를 괴롭힐 줄은 몰랐단 말이야.”

“너 아직 애기구나. 네 아빠가 뭐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니?”

“앨리스, 한 번 더 부탁할게. 엄마를 다시 사람으로 바꿔줘. 아빠가 불쌍하지만 안 되겠어. 너도 알잖아, 앨리스. 너한테 이름도 지어주고 제일 예뻐해 준 가족이 엄마였다구. 그러면 적어도 엄마는 아빠를 두들겨 패지는 않을 거야.”

“괜찮겠어? 그럼 효도수학인지 뭔지 맨날 할 텐데.”

“뭐, 하라면 해야지. 엄마가 아빠한테 맞아 죽는 것보다는야 낫잖아. 그런데 앨리스, 엄마가 사람으로 돌아오면 개로 살던 기억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난 개로 살던 시절을 죄다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엄마가 사람으로 돌아오면 나를 엄청 야단칠 텐데. 엄마를 개로 바꾸어 버렸다고.”

“그건 걱정 말아.”

앨리스가 싱긋 웃었다.

“자기가 원해서 개로 바뀔 때에만 기억이 남아 있어.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개로 바뀌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비유하자면 때린 사람은 잊어먹어도 맞은 사람은 기억을 잘하는 거랑 비슷하지. 더 자세히 설명해줄까?”

“아니,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병진이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앨리스는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병진이는 그 모습에 등에 찬물이 흐르는 것 같아 몸서리를 쳤다.

“그럼 네 소원대로 해줄게. 오늘 네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네 엄마가 다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이제 네 가족이 모두 한 번씩 개로 변했으니 이제 날 찾아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난 영원토록 자유로울 거야. 넌 앞으로 네 가족들이랑 잘해봐.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앨리스는 일어서서 현관으로 갔다. 병진이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현관문 앞에서 앨리스는 병진이를 뒤돌아보았다. 어서 열지 않고 뭐 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병진이는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앨리스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마치 풍선으로 만든 개 인형이 떠가는 것처럼 앨리스의 걸음에서는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에 떠가는 마른 꽃잎같이 가볍고 홀가분했다.

병진이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가 유유히 사라지고 나서 병진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현관문을 닫았다. 잠금쇠를 하나씩 채우는 소리가 감옥 문을 닫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몇 년 동안 가족으로 같이 살던 강아지 앨리스는 이제 자유로워졌다. 앨리스가 부럽지는 않았다. 병진이는 언젠가 자신도 앨리스처럼 완전히 자유로워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안방에 누운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그동안 무척 피곤했나 보다. 병진이의 배 위에 앨리스의 모습을 한 아빠가 올라와 있었다. 배고프다고, 먹이를 달라고, 조깅하러 가자고, 조르고 있었다.


아빠가 없어지자 돈이 쪼들렸다. 엄마는 병진이의 손을 잡고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말했다. 병진이는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 간 집은 낡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병진이는 학원도 태권도장도 그만둬야 했다. 학교까지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다. 엄마는 24시간 운영하는 어린이집 주방에 취직했다. 병진이는 매일 학교를 마치면 하루 종일 집에서 강아지가 된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되었다. 엄마가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밤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전화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병진이는 요리하고 청소하는 법을 익혔다. 아빠가 병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면 병진이는 예전에 앨리스에게 그랬듯이 발로 차거나 밀어내는 대신 방 안에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이젠 누구의 몸에도 손대기 싫었다.

학원도 태권도장도 가지 않는 겨울방학은 춥고 길었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면 창틀에 낀 살얼음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차가운 화장실에서 발발 떨며 얼굴에 물을 끼얹고 나면 부엌에서 틱틱하는 보일러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추워도 아침 조깅을 조르는 아빠를 데리고 나서면 바싹 마른 찬바람이 휘몰아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병진이는 아빠와 열심히 달렸다. 때로는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침에야 퇴근한 엄마가 돌아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병진이는 침대에 누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아빠가 없어서 힘들지?”

병진이가 속삭였지만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퇴근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병진이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엄마가 끊어준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남는 시간에는 집안일을 했다. 세탁과 청소를 하면서 하루를 꼬박 보낼 때도 있었다. 매일 밤 병진이는 아빠를 안고 잠이 들었다. 아빠 없이는 추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병진이는 행복했다. 엄마를 자주 보지 못하는 것만 빼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났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병진이에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병진아.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니?”

보고 싶을 리가 없다. 매일 같이 살고 있는데.

“이제 아빠가 우릴 떠난 지 반년이 지났어. 아빠가 일부러 우릴 버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나쁜 일을 당하셨을 수도 있어. 하지만 엄마 생각엔 아빠가 돌아오실 것 같지 않아. 병진이 너 생각은 어떠니?”

병진이는 엄마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낯선 아저씨를 집에 데리고 오자 이해할 수 있었다. 새아빠가 생긴다는 사실을. 엄마의 새 남편이 될 아저씨는 아빠보다 덩치도 크고 둥글고 붉은 얼굴에 땀을 뻘뻘 흘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저씨는 껄껄 웃으면서 두툼한 손으로 병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더니 아빠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

“이야, 집에 강아지도 키우는구나! 아주 맛나게 생겼는데!”

병진이는 그때 아빠의 부들부들 떠는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병진아, 아빠 살려 줘. 그건 분명 아빠의 눈빛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빠는 병진이의 바짓 자락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새아빠가 아빠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예전에 아빠가 그랬듯이 매일같이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다시 병진이나 엄마가 강아지가 될 수도 없다. 그러면 아빠가 사람으로 돌아오고, 새아빠까지 합치면 한 집에 아빠가 둘이나 생기게 되니까.

중학생이 되자 바빠졌다. 학원에 가지는 않지만 학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늦어졌다. 새아빠가 될 아저씨는 가끔 저녁을 먹으러 집에 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며 어색한 듯 눈알을 굴리며 앉아 있으면 병진이는 아빠에게 리드줄을 매고 공원으로 나갔다. 한 시간 정도 힘껏 달리다 오면 아저씨는 가고 없었다. 가끔은 엄마도 아저씨를 따라 나가고 없을 때도 있었다. 병진이는 아빠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남은 설거지를 했다. 왠지 몸이 무거웠다.

“이젠 너도 중학생이야. 어른스러워져야지.”

엄마는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병진이의 교복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주변을 슬며시 돌아보더니 병진이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말 잘 안 들으면 아빠한테 말해서 혼낼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도록 해.”

어느 아빠? 순간 병진이는 심하게 머리가 흔들렸다. 엄마는 새아빠를 말한 거겠지. 병진이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나도 중학생이야. 아빠도 나도 더 이상 괴로워할 수는 없어. 

병진이는 아빠를 리드줄에 묶고 공원에 나갔다. 둘 다 심장이 터져나갈 만큼 달린 다음, 병진이는 리드줄을 풀었다. 줄에서 풀려난 아빠는 병진이를 돌아보았다. 집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병진이는 아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집을 떠나는 앨리스처럼 가벼움만 가득한지, 강아지가 된 엄마처럼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지 궁금했다. 아빠의 눈망울에 중학생인 병진이가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뒤섞인 감정이 떠올랐다. 병진이는 가슴이 꽉 막혀왔다. 

그러나 아빠는 시간을 끌지 않고 네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리고 병진이의 손을 살며시 핥고는, 등을 돌리더니 휙 하고 새벽이슬에 젖은 텅 빈 공원길을 내달려갔다.

“아빠, 내가 매일 올게. 밥 가지고 올게.”

달려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 병진이의 눈에서, 아빠에게 얻어맞았을 때보다도 짜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달 후, 공원을 뛰놀던 한 소녀가 벤치 위에 앉아 있는 비글 강아지를 발견했다.

“와아, 귀여워! 정말 귀엽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가만히 앉아 소녀의 손길을 탔다. 소녀는 강아지가 도망치지 않아 기뻤다. 계속 쓰다듬고 귀를 만지작거려도 강아지는 가만히 있었다. 소녀는 이 강아지가 좋아졌다.

“너, 나랑 같이 가서 살래?”

소녀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집으로 향했다.

어느 날 밤 소녀가 너무 지쳐서 말없이 앉아 있자 강아지가 소녀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소녀는 강아지의 털을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천천히 소녀의 손을 핥으며 위로했다. 그리고 팔에 머리를 얹는 대신 똑바로 쳐들어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사람의 말로 속삭였다.

“너, 나랑 바꿀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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